할머니 가족과 만난 후 아주 특별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일본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 이름이 ‘손상자’였다. 할머니 댁에서 나이가 비슷한 딸, 며느리들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중 할머니의 며느리인 손상자씨가 전화한 것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손씨는 처음부터 “정희 언니”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정희 언니 우리 만나자요. 함께 밥 먹고 커피 마시자요.” 손씨는 조선학교에서 붓글씨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우리는 주중에 수업이 없는 날 만났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 등 음료수도 무한정 먹을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점심에 만나면 저녁 시간까지 교제했다.
복음 이야기는 잘 나누지 못했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그에게 넘쳐 보이길 기도했다. 나중에 오사카로 오게 됐는데 마지막 만남 때 성경책을 선물로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학교 교사인 그는 한국어를 좀 더 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통해 한국식 표현들을 알고 싶어 했다. 지금도 조선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언어가 맞는지 우리 부부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 일본 땅에서 배운 언어가 자기들뿐 아니라 한국인에게 통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손씨와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하나님은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하셨다.
“정희 언니,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는 데 고민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일본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하지만 조선학교는 비인가 학교로 분류돼 모든 세금을 내야 한다.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기에 학교 운영이 오롯이 부모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교는 교사의 월급을 감당하지 못한다.
훗날 오사카에서도 보게 됐지만 대체로 일본 내 조선학교는 외곽으로 밀려난 곳에 있기에 학생들이 통학을 위해 져야 하는 교통비 부담도 만만치 않다. 일본은 교통비가 정말 비싸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조선학교를 졸업해도 일본 사회에서 학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류사회에 편입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녀를 조선학교에 보낸다는 건 부모로서 말할 수 없는 아픔과 헤아림을 감내하는 일인 것이었다.
이에 불만이 있다면 ‘일본인으로 귀화하라’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손씨는 이런 상황이 고민되지만,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조선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자신도 부모님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학교에 보내줬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조선학교에 있어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의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정희 언니, 우리 학교는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시 85:1)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