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에서는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도 분별이 필요하고, 인생 갈림길에서 어느 길이 더욱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영적 분별은 소중하다. 신앙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좇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부터 한 사람 안에는 천사의 영과 악마의 영이 끊임없이 분투하며 한쪽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활동을 하고 다른 한쪽은 그 영광을 가리고 원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책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분별하는 것을 거룩한 삶의 요체로 보았다.
이에 영적 분별의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공유하곤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분별하는 사람 안에 흐르고 있는 정서의 흐름을 살피는 일이었다. 정서는 마음의 느낌, 색깔, 분위기를 말한다. 분별을 하는데 사랑과 내적 평안과 소망이 정서로 자리 잡은 가운데 하면 이때가 천사의 영에게 이끌림을 받는 순간이요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기로 보았다. 반면에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 더 나아가 분노와 증오가 흐르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악한 영에 의해 휘둘리는 순간으로 보았다. 설혹 그 일이 거룩한 일같이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같이 보여도 사실 그 일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마귀에 휘둘리는 일로 본 것이다.
필자가 쓰는 언어가 천사 마귀 등 신비주의적 언어여서 현대를 사는 필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전달하는 이미지는 21세기를 사는 오늘에도 매우 실용적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어떤 내적 정서가 흐르면서 특정한 판단을 하고 사회 현상을 이해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지, 그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훼손하는 일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특정한 사회 현상을 판단하는데, 염려와 두려움과 증오와 배제의 정서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사랑과 평안과 소망의 정서로 판단하는가. 이는 한 정치지도자나 사회종교지도자의 말이 천사의 영의 것인지 원수의 영의 것인지를 분별하는데도 요긴하다. 그 지도자의 식견이나 정치·종교적 주장은 사랑과 평안과 화해의 내적 정서에 의해 말하는가. 그 안에 내적 평안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이 담겨 있는가. 아니면 대중에게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 넣어주고, 특정인이나 특정그룹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여 대중을 그 방향으로 선동하는 길을 취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의·주장은 전문적 영역이어서 난해할 수도 있지만, 내적 정서를 알아차리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기에 이 내적 정서는 쉽게 하나님 뜻을 알아차리는 데 매우 실천적이다.
대중에게 특정 그룹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의 정서를 집어넣어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룬 경우가 역사에서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에는 마녀사냥식 종교재판이었고 20세기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이었다. 사람들은 오해한다. 이런 것들은 히틀러나 중세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독단적 전횡의 산물이었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자신의 의도를 교묘하게 숨긴 악한 지도자들과 혐오와 배제의 영에 휘둘린 대중이 한 마음이 되어 이루어낸 역사의 비극이다. 나치즘에 독일 국민이 기립박수를 치고, 아우슈비츠 독가스의 길로 유대인들을 몰아갈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뜻을 행하는 줄 알았다. 그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들을 향한 마땅한 응징으로 알았다. 지나고 보니 집단 환각 상태였던 것이 드러났다. 이런 비극은 생각만 해도 섬찟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재현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비극으로 종결되기 전에 이런 일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까. 지금 말하는 지도자의 주장에 흐르는 정서가 어떤 것인가. 사랑의 정서인가 아니면 혐오와 배제 심지어 증오의 정서인가. 만일 후자라면 그 정서가 만든 부정적 에너지는 개인에게서 흘러나와 듣는 사람들의 내면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이것이 집단적 광기를 만들어 낸다. 깨어 각 사람이 자기 안의 정서를 들여다볼 때이다.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