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신나는교회를 섬기는 정화건 목사는 한국교회 폭염 해결사로 통한다. 그는 2002년부터 전국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1만대 넘는 에어컨을 고쳐줬다. 요즘도 정 목사는 픽업트럭에 각종 공구를 한가득 싣고서 전국을 누빈다. 강원도 두메산골부터 남해의 낙도까지, 한반도 거의 대부분 지역에 그의 발자국이 찍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 목사의 행보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 중 하나는 지난해 시작한 해외 사역이다. 그는 지난해 5월 베트남에 자신이 대표로 있는 냉난방선교회의 첫 해외 지부를 만들었는데, 최근 안부를 물었더니 다음 달 필리핀에도 지부를 세울 거라고 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랬듯 필리핀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에어컨 수리 노하우를 전할 계획이다. 그런데 그의 ‘에어컨 사역’은 어쩌다 국경을 넘게 됐을까. 정 목사의 해외 사역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해 여름, 강원도 춘천의 한 교회에서였다. 그는 “더운 지역에서 ‘기후 약자’로 살아가는 이웃들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더워서 죽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가서 도와야죠.”
실제로 앞으로 예고된 엄청난 기후재앙에서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에어컨이 될 것이다. 에어컨은 갈수록 심해지는 폭염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이런 주장의 밑받침이 될 만한 데이터도 많다. 에어컨이 없던 1920년대 미국에서 폭염이 사망률에 미친 영향은 지금보다 6배나 높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폭염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는 부자 나라 국민보다는 에어컨 없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게 불문가지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에어컨을 둘러싼 논의엔 희한한 딜레마가 숨어 있다. 에어컨 냉매로 많이 쓰이는 수소화불화탄소는 엄청나게 강력한 온실가스다. 가난한 나라에 에어컨을 보급하는 캠페인이 벌어져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면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기후변화 탓에 사선으로 몰린 빈곤국 사람들을 구하는 것보다 에어컨 사용을 줄여 ‘미래의 생명’을 구하는 게 우선 아닌가. 즉 현재를 위해 미래를 희생할 것인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할 것인지 따지는 ‘에어컨 딜레마’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딜레마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이미 존재한다. 선진국들만이라도 적극적으로 탄소배출 감축 노력에 나서면 된다. 기후변화 논의에는 ‘50-10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①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인류의 상위 10%가 전체 배출량의 50%를 만들고 있다. ②오염의 책임이 덜한 인류의 50%가 온실가스 전체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밖에 안 된다. 이런 근거가 있으니 국제사회는 그동안 선진국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내놓곤 했다. 문제는 이런 내용의 협정이 만들어져도 그것이 항상 카드로 만든 집처럼 쉽게 무너져내리길 반복했다는 점이다.
난망한 미래를 바꿀 방법은 없는지 고민할 때마다 뜬금없이 떠오른 인물은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다. 최근 미국의 관세 협상에서 보듯 트럼프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벌이는 짓은 강탈에 가깝다. 자연스럽게 현재 지구촌에 ‘국제 질서’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자문하게 되는데, 이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트럼프만 앞장선다면 백년하청으로 여겨지던 문제들도 한 방에 해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가 기후변화 해결사로 나선다면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돼도 트집 잡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개과천선을 기대하는 것은 기후문제 해결보다 더 황당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박지훈 디지털뉴스부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