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나비는 거북의 눈물을 마신다’. 아마존에 사는 이 나비는 거북의 눈물 속 염분을 섭취해 힘을 얻는다. 그런데 ‘눈물을 마신다’라는 문구가 마치 ‘슬픔을 마신다’처럼 읽혔다. 남의 슬픔을 마시며 사는 삶도 있을까.
전공의 1년 차 때였다. 자정쯤 당직을 서며 중환자실 의자에 기대 졸고 있던 내 앞에 다른 과 1년 차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다짜고짜 눈물을 흘리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꺼내놓았다. 세 명의 환자가 사망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의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1년 차인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쏟아지는 잠 속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하루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 친구는 이야기하고 나니 한결 낫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눈물에서 힘을 얻은 것처럼. 나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는 공감할 수 없던 사람이 자신의 피로에는 쉽게 공감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고된 전공의 시절의 단면이다. 눈물과 피곤 사이를 오가며 눈물 앞에서 졸기도 하고 반대로 눈물을 보고 졸음을 이겨내기도 했던 시간. 눈물과 땀을 흘리고 때론 잠들기도 했던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 그 장소들은 우리의 고치였다. 우리는 그 장소들로부터 태어났다. 그 친구를 포함한 전공의들은 4년 후 전문의라는 날개를 달았다.
하지만 이젠 그런 눈물이 없다. 그때는 다른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며 내게 있을지도 모를 인간적 연민을 찾곤 했다. 지금은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래서 전공의 시절이 그립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을 그때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다. 단지 젊음만은 아니다. 전공의 시절 그렇게도 되고 싶었던 의사의 모습이 현재 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하기란 단순히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흔적 주위에 자리 잡은 감정들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감정을 빼고 기억하기는 어렵다. 기억 자체가 감정이다. 그런 기억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시간이 흘러 뒤돌아볼 때에만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게 되살아난 옛 모습은 지금의 내가 어떤지 말해준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느낄 수는 있다. 감정이 그동안의 시간을 건너와 섬세하게 되살아오면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고, 과거가 아직 내 삶에 의미 있게 살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억을 통해 과거는 지금 그리고 ‘여전히’ 의미가 있다. 눈물까지 흘리진 않더라도.
의학적 자질이 학습의 결과이듯 연민도 학습의 결과다. 수많은 정서들에 노출된 경험에서 한 의사의 감정적 자질이 갖추어진다. 전공의는 감정 경험이 많은 시기다. 의사의 눈물이 얼마나 흔할까마는 울게 된다면 전공의 시절이지 않을까. 죽은 환자를 덮는 하얀 덮개포가 마치 자기 몸을 덮는 것 같다며 울던 전공의는 옆에 같이 울고 있는 환자 가족을 보고 눈물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고 했다. 이후로 그 전공의는 환자 가족의 눈물만 보면 밤을 새우며 환자 곁을 지켰다. 그러니 눈물 속에도 힘이 있었던 셈이다. 나비가 마시는 눈물처럼. 병원은 눈물이 많은 곳이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눈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눈물 속에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을 먹고 살았다.
전공의들이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을 바란다. 어서 병원으로 돌아가 기억을 만드시라. 오랫동안 되돌아볼 과거를 남기시라. 눈물이 있는 장소로 돌아가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마시고, 보고, 기억하길. 전공의라는 고치 속에 의사라는 나비를 품고 언젠가 눈물을 마시는 나비가 되시라. 슬픔을 마시는 사람, ‘의사’가 되시길.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