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에는 발길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 그날의 공기, 사람들의 숨결 같은.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얼마 전, 작은 정원이 딸린 갤러리에서 본 방명록에 적힌 마음과 이름들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방명록 책자를 발견해 짤막한 감상평을 적고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적어둔 글귀를 가볍게 훑어봤다. 그런데 간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방명록이 여러 날 아른거렸다.
그 잔상은 갤러리에 놓인 방명록처럼 숱한 삶이 오가는 이 세상에도 누구나 자유롭게 쓰고, 읽을 수 있는 방명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영원할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불쑥 떠나는 생애에 저마다 남기고픈 소감이 있을 테니까.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써 내려가는 방명록이 있다면 그야말로 인류 공통 저자의 잠언집이 될 듯하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선 연인에게 사랑의 말을 남기고, 또 누군가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자신에게 편지를 남기겠지. 그렇게 모인 문장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들고 나며, 아름다운 시가 되고 간절한 기도로 읽히지 않을까. 삶의 길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지혜의 등불이, 벽에 부딪힌 이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손이 될 테지. 상실과 환희, 후회와 반성, 사랑과 용서처럼 삶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온갖 감정들이 담기는 모두의 방명록. 먼저 이 세상을 거쳐 간 이들의 진심이 생생한 숨결로 남아 있다면, 우리 또한 이곳에 머무는 동안 더 충실히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기자기하게 인생을 꾸려가다 보면, 언젠가 내게도 한 마디 남길 시간이 찾아올 텐데, 그 순간 어떤 말을 고르게 될까. 잴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을 대신해 활자로 남길 인생 소감을 미리 고민해본다. 점잖게 “덕분에 잘 있다 갑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할까 싶기도 하고, 유쾌하게 “재밌네. 한 번 더!”라고 외치고 싶기도 하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