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弔鐘)이 울리고 있다. 누구의 장례식인가 물으니, 신자유주의가 수명을 다했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공격적인 관세 압박을 가할 때 한 기인의 일탈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그러나 세계 주요국 수뇌부가 차례로 머리를 조아리며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걸 보며 이 부조리가 새로운 질서로 굳어진 걸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체제가 장기적으로 존속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이전 체제는 무너졌고 복귀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발 세계화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용어 앞에서 느낀 긴장과 갈등, 국제통화기금(IMF) 개입 때 탄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나고 보니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한국은 자유무역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경제 규모 면에선 한국이 선진국이 된 것을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선진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정의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치 않다. 이 기간 한국은 자살률과 이혼율, 우울증 발병과 사회갈등이 세계 최고조에 달하는 나라가 됐다. 심해지는 빈부 격차와 고용 불안정, 공교육의 붕괴와 빈번한 산업재해, 지구온난화 등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기성세대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하고 있다. 경제 체제 속에서 활로를 잃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극단화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삶을 규율하는 질서’로 기능했고 인간관계와 삶의 의미까지 바꾸는 가치 체계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서 다른 가치는 뒤로 밀려났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던 한국사회에 그 병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단순한 수사로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세계화의 흐름에 소외된 지역 경제들은 무너졌고 빈부 격차와 사회적 소외는 격화됐다. 신자유주의가 소생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다.
이 큰 전환기는 지난 40년을 정직하게 복기하며 우리 사회의 병폐와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강대국의 이익 추구를 ‘모두의 이익’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시대였다면 작금의 탈세계화는 노골적으로 자국 이익을 추구하며 힘으로 약한 나라를 억압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구세주도 아니고 절대악도 아니다. 국가 간 경계를 낮춰 함께 잘 사는 세계를 만들자는 선전은 과도한 수사였을지언정 알맹이 없는 미몽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같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로서는 인적 물적 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상호이익 추구라는 이상과 전략을 포기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놓쳤던 경제적 약자를 향한 배려와 사회 안전망을 갖추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번 관세 협상 타결에 농민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건 우리에겐 대단히 낯선 풍경이자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이다. 오랫동안 농민과 노동자는 기업과 무역을 위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쪽이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심각한 반감과 불신도 이 지점에 있다.
물론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약자를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쟁과 효율만이 아닌, 연대와 돌봄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극단적인 물질 중심의 가치 체계를 반성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시인이자 목회자였던 존 던은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조종 소리를 듣거든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지 말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돼 있으니, 이웃의 죽음을 내 일부가 스러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라 했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삶의 목표가 되고,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를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감성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 가운데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이 시작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