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고정희 (12) 시장에서 만난 조선인 할머니 “한국어 배우고 싶어요”

입력 2025-08-05 03:04
고정희 선교사 남편 이성로(왼쪽) 목사가 2017년 일본 아이치현 도요하시의 조선학교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참관하며 미소짓고 있다. 고 선교사 제공

2014년 3월은 꽃샘추위로 싸늘했다. 시장을 거닐다 남편에게 “돼지고기를 사서 아이들과 김치찌개를 해 먹자”고 말하던 차였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일본어로 다가오셨다.

“혹시 한국인인가요.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저희는 목사와 사모인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전화번호를 주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일본 할머니를 전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도요타에는 여러 나라 근로자들이 많았지만 한국인은 없었다. 교회에 오는 성도들도 인근의 큰 도시에서 오고 있었다. 연락처는 받았지만 할머니에게 연락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있던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들이 말을 꺼냈다. “이 할머니께 연락드렸어요?”

그날 김치찌개를 먹으며 시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어쩌면 아들의 입을 통해 주님이 명령하시는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바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얼마 전 시장에서 만났던 부부입니다.” “기다렸습니다. 오늘 어떠세요.” “네. 좋습니다.” “제 언니가 있는데 언니도 한국어를 좋아해요. 함께 나가도 될까요.” “당연히 좋지요. 같이 뵙겠습니다.”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게 전도의 문이 열리는 듯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나갔다. 약속했던 카페에 먼저 도착한 우리 부부는 출입문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와 언니로 보이는 할머니가 들어오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은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그 아이는 남편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 조선말로 말했다.

“할머니 나 졸업할 때 장학금 주신 선생님이야요.”

“보람아 너 어떻게 여기에 있어?” 남편도 놀라서 말했다. 보람이는 언니 할머니의 친손녀로 도요하시에 사는데 봄방학을 맞아 할머니집에 놀러 와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조선학교에서 만난 아이와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가 이렇게 연결돼 있었다. 할머니들의 손녀에게 장학금을 준 사람이었던 터라, 우리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보람이가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남편 목사님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졸업식 때 다른 분이 장학금을 건네주었으면 보람이가 기억했을까.’ 주님은 여기까지 생각하셨구나. 주님의 일하심은 정말 섬세하고 경이롭다.

할머니들은 생각보다 우리말을 너무 잘하셨다. 도요타에서는 한국 사람 보기가 쉽지 않은데 그날 시장에서 갑자기 들려온 한국말이 너무 반가워 자연스럽게 발길이 따라갔다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재일조선인 만남이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 이렇게나 순조로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선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