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 장수(長壽)는 인간의 가장 큰 복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장수가 복인지 모르겠다. 전에 집안 행사에서 한 어르신께서 인사말을 하셨다. 어르신 나이가 이제 미수(米壽)라 하셨다. 88세가 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그 말씀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어르신의 젊을 적 생각에는 자신의 연수가 60이라 했을 것이다. 좀 더 복을 얻으면 70세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은퇴하고 한 10년 자식의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자손의 복을 누리다 가는 것이다. 그런데 88세가 되어도 정정하고, 아직 연수가 많이 남아 있다. 젊을 적 계획보다 이제 18년을 더 살았는데 아직도 살날이 남았다. 삶의 여건은 차치하더라도 이 어르신은 적어도 지난 18년 동안 죽음을 이고 살았을 것이다. 장수하면 70세라 생각했으니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의식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어떻겠는가. 자녀들도 60대에 들어섰다. 죽음을 가까이 모시기 시작하는 때인데 나보다 앞서 있는 부모님을 살펴야 한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은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내 앞의 일이 되었다. 부모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요즘 50대 후반 동료들과 모이면 가장 핫한 이슈가 부모님 봉양이다. 노인장기요양등급부터 요양원, 국가의 혜택 등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이제 곧 은퇴인데 부모님 뒷바라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이슈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늙어가는, 그래서 죽음과 가까워지는 부모님의 모습이다. 과거 같으면 10년 정도 겪었을 문제를 우리 부모님은 30년에 걸쳐서 겪고 있다. 몸의 노화와 질병, 그리고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 등이 아주 천천히 슬로비디오처럼 흘러간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일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나의 뇌리에 박힌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삶은 무엇인지,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연장된 삶은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은 과연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든다.
요즘 서점가에 가 보면 죽음에 관련된 책이 많다. 사람들의 관심이 죽음에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 수업’이다. 이 책은 호스피스 사역을 했던 저자의 경험에 근거했다. 특히 그녀는 죽음의 5단계 모델을 제시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다. 호스피스에 오는 이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평온한 죽음을 마주하기까지 돕는 것이 호스피스의 역할일 것이다. 대중이 이 책에 반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을 마주하는 태도가 자신에게 주는 교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교회에서는 ‘오늘이라도 죽으면 천국에 갈 믿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꽤 던졌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도 전도에 유용하게 쓰였다. 모두가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 도전을 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의학 발전과 사회의 안전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이러한 질문과 구호는 효용성을 잃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장수하게 되면서 죽음에 대한 묵상은 더 깊어졌다. 각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안고 있다. 죽음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종교는 이 시대에 효용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달라진 질문에 오늘의 기독교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이지 고민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가장 깊은 연관성을 가진 종교가 이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아서 질문의 돌을 한 번 던져본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
목회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