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마 옷장 뒤지던
꼬마 탐정의 호기심과 집요함
글 쓰는 이에게 꼭 필요한 자질
꼬마 탐정의 호기심과 집요함
글 쓰는 이에게 꼭 필요한 자질
어릴 때는 나는 주로 혼자 놀았다. 동네에 아이들이 많지 않았고, 구슬치기, 숨바꼭질 같은 놀이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탐정 놀이였다. 누군가 남겨 둔 단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좋았다. 물론 그 놀이는 늘 비밀스러워야 했다. 몇 개의 단서가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로 엮일 때까지 그것을 잘 지키는 건 탐정의 중요한 임무였으니까.
탐정 놀이를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엄마의 옷장이었다. 문을 열고 캄캄한 안쪽을 향해 상체를 쑥 집어넣으면 그곳은 하나의 세계가 됐다.
엄마의 옷장은 늘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어른의 옷에서는 내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냄새가 났다. 엄마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질질 끌리는 원피스를 입고,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는 게 좋았다. 가죽점퍼를 걸치면 왠지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는 나의 미래가, 아직 오지 않은 세계의 조각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단서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아직 모르는, 그러나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세계의 문을 열어줄 단서를.
옷장 앞에 설 때면 동화책 속 탐정을 따라하려고 할아버지의 돋보기를 들었다. 그걸 쓰면 어지러워서 늘 손에 쥐고만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깊숙한 곳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중요한 것을 옷장 깊은 곳에 감춰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스스로 감춰둔 것을 까맣게 잊는다는 것도.
옷장을 뒤지는 호기심, 이야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려는 집요함, 잊힌 보물을 발견하고자 깊숙이 들여다보려는 아이의 몸짓은 사실 글을 쓰는 이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니까.
나는 이야기를 쓰기 전에 종종 옷장 앞을 서성이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의 호기심과 두근거림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무엇보다 옷장 안에 들어갈 만큼 내가 작아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여기서 작아지는 것은 이미 커버린 몸이 아니라 비대해진 자아다. ‘나’라는 인식이 작아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드시 ‘나’보다 옷장, 다시 말해 이야기가 더 커야 한다. 이야기가 나를 증명하는 도구로 쓰이는 게 아니라 내가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의 이야기’, ‘나의 감정’, ‘내 생각’을 나를 보호하거나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쓴다면 그것은 자아의 확장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나’는 이야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의 요소, 하나의 시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세계에 나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을 모두 덜어내야 한다. 지나치게 확고한 자의식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알아차리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으로 다시 시작해보자. 이야기는 아는 것을 풀어내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다. 아이의 탁월한 호기심으로, 꼬마 탐정의 집요함으로.
한때 유능한 탐정이었던 내가 옷장 안에서 발견한 가장 멋진 보물은 부모님이 연애하던 시절에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흰 눈밭에서 다정히 껴안은 연인이 그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것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엄마에게 사진 속 연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고 농담처럼 물었고, 엄마는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네가 되어 있지.”
부모의 청춘과 사랑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발견한 일, 이것은 나의 옷장 속에 숨겨진 단서다. 한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보물이다. 그것을 꺼내 이렇게 펼쳐 놓는다. 누군가 그 시절 나의 그 호기심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기, 우리를 위한 이야기가 되어 있지.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