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다. 우리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역사를 큰 인물들의 영웅적 서사로만 기억한다. 항상 의문이 있다. 이름 없는 평범한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일각에서 주장하듯, 먹고 살기에만 바빠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에 순응하며 자신의 살길만을 찾아다녔을까. 무명인(無名人)의 삶에 천착하고 있는 젊은 역사학자 이동해는 아니라고 말한다. “식민지의 삶에서 불의를 느낀 사람들은 각자 역량껏 독립운동을 실천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어떤 시기든 상관없이 이런 사람들은 식민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외침들은 켜켜이 쌓여 독립의 밑거름이 된다.”
이름 없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저항의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 카드’에서 시작된다. 일본 강점기에 제작된 6000여장의 카드 뭉치로 수형자, 수배자, 감시 대상자의 정보를 카드에 적고 사진을 붙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잡아들이는 데 활용했다. 유관순과 안창호 등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 인물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저자는 이 가운데 40명을 추려 카드에 수록된 기록을 토대로 판결문과 수사기록, 당시 신문기사, 관련 연구 자료를 함께 살펴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평범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복원했다.
책은 카드 작성이 시작된 1919년부터 광복 직전 1943년까지, 비록 실패했더라도 작게나마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3·1만세 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1919년 3월 17일, 서울 남대문역 3등 대합실에서 화가 신동윤은 인파 속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은 고향에 돌아가면 한국 독립 만세를 절규하라.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자가 없다면 한국의 독립은 기약할 수 없다.” 신동윤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190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황웅도. 만세 시위의 열기가 주춤해질 무렵인 1920년 조선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또래 청년 10여명과 함께 ‘고성일심회’를 조직한다. 이듬해 1월 3일 1회 총회가 개최되고 그 자리에서 황웅도가 쓴 설립 취지서가 낭독된다. “우리 사회가 작년 이래 처음으로 눈을 떠서 손을 움직여 수백년간 황폐하고 쇠퇴하여 꽃이 떨어진 동산에서 호미와 괭이를 들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 ‘꽃이 떨어진 동산에서 호미와 괭이를 들자’는 여기서 따왔다. 황웅도는 일제 감시망에 포착돼 8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당시에는 독립의 열망을 가진 동료의 돈을 가로채는 사기꾼도 있었다. 부평의 한 공장에서 가상의 조선독립당의 당원이라고 속인 윤석균이라는 인물에게 공장 직공 정재철은 독립운동 자금 등의 명목으로 520원을 건넸다. 자신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윤석균은 사기범으로 처벌됐지만 정채철도 역시 조선 독립을 바라면서 돈을 건넨 것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판단돼 징역 1년이 선고된다.
책은 이밖에도 독립운동사에서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이름들을 되살려 낸다. 만세 시위를 막으려는 군수를 질책한 열여덟 소년 한범우, 일본 천황과 황후 사진에 색연필로 붉은 칠을 해버린 점원 이도원, 경성방직 파업을 주도한 문학소녀 이효정,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독립 만세’라는 ‘불온’ 낙서를 한 승강기 운전수 최영순, 도둑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이제국, 축구부로 위장한 학생 비밀결사를 만든 김철용, 조선말을 쓴다는 이유로 체포된 점원 이삼철…. 그들의 면면을 읽다 보면 식민지 조선에선 글자 그대로 ‘쉼 없이’ 독립운동이 펼쳐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세·줄·평 ★ ★ ★
·무명인의 독립 운동사 발굴이 반갑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식민지 조선의 치안책임자였다면 정말 괴로웠을 것이다
·젊은 역사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무명인의 독립 운동사 발굴이 반갑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식민지 조선의 치안책임자였다면 정말 괴로웠을 것이다
·젊은 역사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