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일어나면 한 시대의 제작이 있다.”
백자 달항아리도, 익살스러운 풍속화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 미와 문화의 ‘시그니처’는 모두 조선 후기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정기를 다룬 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 조선 전기 미술을 다룬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8월 31일까지)은 신선하다. 이미 완성된 아름다움이 주는 충족감은 덜하지만 그 조선의 미를 완성해가려는 의지와 과정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그런 의지는 조선 건국의 주역 중 한 명인 삼봉 정도전이 남긴 이 문장에 응축돼 있다.
이번 전시는 용산 이전 20주년을 기념하는 야심작이다. 안견의 ‘사시팔경도’ 등 691건이 쏟아졌고, 국보가 16건, 보물이 63건이 동원됐다. 이애령 학예연구실장은 28일 “15∼16세기 조선 전기 미술의 면모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보다 현존 작품 수가 적고, 주요 작품 중 다수가 국외에 있어 접하기 어려운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특별전을 위해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모리미술관, 프랑스 기메박물관 등 5개국 24개 기관에서 40건을 대여해왔다. 이중 일본 개인 소장의 ‘백자 청화 산수·인물 무늬 전접시’ 등 23건은 최초로 우리나라에 선보이는 것들이다.
전시는 조선 전기 미술을 백(白)·묵(墨)·금(金) 등 세 가지 색으로 분류했다.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각기 도자기, 회화, 불교미술 등 장르별로 나누는 가장 쉬운 분류법을 택했다. 도자기는 조선백자, 회화는 수묵 산수화, 불교는 금불 등에서 세 가지 색을 가져왔다. 억불숭유의 새 나라, 유교적 이상사회를 이룩하려는 조선의 철학과 예술을 도자기와 회화, 불교 미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미학적 관점에서는 안전하지만 상투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자기, 회화 등 장르를 초월해 조선 전기 미술의 미적 성격을 몇 개 키워드로 제시하는 ‘과감함’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새로운 해석의 깃발’이 없다 보니 조선의 미에 대한 해석은 관람자의 몫으로 넘겨졌다.
이번 특별전을 미술 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 전시로 보고 동선을 따라가면 새 나라 조선의 역동성, 체제 정비의 의지 등이 읽혀 재미있다. 고려 시대부터 누적된 공납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새 왕조는 건국 원년부터 호조에서 개선책을 마련했다. 전국 각처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에는 ‘진주장(흥고)’ 등 공납 지역 관사 이름을 새기게 하는 특단의 조처를 했다. 그릇 밑바닥에 ‘이하일’ ‘김신’ 그릇을 만든 장인 이름까지 새겼다.
분청사기보다 기술적으로 한 수 위인 백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한다. 최상품 백자 생산을 위해 경기도 광주에 중앙정부가 운영하는 관요가 생겼다. 전국의 사기장 380명이 차출돼 190명씩 2개 조로 나뉘어 근무하는 관요는 기존 지역 장인의 납품 방식을 대체하며 조선 도자기 생산 흐름을 이끌었다. 관요 출현 이후 지역 도자기 장인들은 납품 의무에서 벗어나고 정부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예술 정신을 발현하며 덤벙 기법, 귀얄 기법의 분방한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넥타이 매병’이라는 별칭이 붙은 철화 기법의 백자, 용무늬가 새겨진 백자 등 조선 전기 백자의 완성도 높은 조형미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회화 코너에서는 조선 전기 회화를 특징짓는 안견 풍 수묵산수화를 대거 볼 수 있다. 일본 모리미술관 등 해외 소장 조선 전기 산수화가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 나들이를 했다. 계회도의 변천사도 재미있다. 계회도는 문인 관료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야외에서 가진 모임을 기록 사진처럼 모임에 참석한 사람 수만큼 그린 그림이다. 초기에는 한양에서 모인 것이라도 중국 산수풍으로 그렸지만, 점차 조선의 풍경으로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산수 위주 그림에서 개미처럼 작게 그려진 사람의 모습도 점차 커진다. 1584년경 정1품 이상 왕실 종친과 정 2품 이상 벼슬을 지낸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들 모임인 기영회를 그린 ‘기영회도’에서는 인물들의 동작이 드라마 장면처럼 구체적이라 17세기 이후 풍속화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 같다.
귀한 회화가 대거 나와 원본이 주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그런데도 미디어 아트, 인쇄된 그림 등이 회화 옆에 과도하게 전시됨으로써 원본에 대한 몰입을 방해해 개선이 필요하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