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땀의 가치

입력 2025-07-30 00:35 수정 2025-07-30 17:08

올해처럼 심한 폭염 속에서도
고된 운동 뒤에는 글 잘 써져
힘들지만 '바르고 건강하게'

작가로 살면서 가장 괴로울 때가 언제일까. 심혈을 기울인 역작을 출간했는데,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할 때? 괴롭다. 단, 그럴 땐 믿고 인내한다. 언젠가 반응할 거라고. 그래서 몇 달을 기다려 마침내 온라인 서점에 정성껏 게시된 리뷰를 봤는데, 열과 성을 다한 악평이라면? 더 괴롭다. 하지만 그럴 땐 재빨리 새 작품을 써서 호평으로 악평을 덮으려 한다. 그래서 새 작품을 썼는데, 더 나쁜 평으로만 가득해졌다면? 이건 좀 더 아프다. 불필요할 만큼 자세히 아는 이유는 내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뭐, 이건 내 사정이고…. 그럼 이게 작가 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괴로운 점이냐고? 아니다. 조금 어희(語戲) 같지만, 작가로 살면서 가장 괴로운 점은 작가로 산다는 것 그 자체다. 10년 이상 작가로 지낸 사람은 다른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취직도 안 되고, 사업할 돈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써야 한다.

이 괴로움을 환언하자면, 그건 ‘글이 써지지 않는 처참함’이다. 이 직업을 택한 이유는 돈 때문도 아니요, 명예 때문도 아니요(예상했겠지만 나의 경우 글을 쓸수록 돈과 명예에서 더욱 멀어진다), 글을 쓰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기는커녕 그 작업이 멍에가 되어 내 삶을 옥죄고 있다면? 정말 죽을 맛이다.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바야흐로 여름인 탓이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지라, 여름만 되면 머리의 퓨즈가 나가버린다. 정신이 멍해지고 온몸이 땀으로 끈적끈적해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다. 아내는 장난삼아 “여보는 왜 여름만 되면 바보가 되는 거야?”라고 했는데, 그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너무나 맞는 말이어서. 지적으로는 물론 외관상으로도 땀을 많이 흘려 상당히 멍청해 보인다.

하여, 여름만 되면 늘 샤워를 여러 번 하고 끙끙대며 어떻게든 글을 써보려 했다. 물론 잘 안 됐다. 그런고로 올해에는 전략을 바꿨다. 몸을 더 이상 땀이 나오지 않는 상태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어찌 인간이 그리할 수 있겠느냐 싶겠지만, 글 한번 잘 써보고자 불가능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일단 땀의 주범인 군살을 빼기로 했고, 또 군살의 주범은 음주이기에 금주를 결심했다. 결심한 지 20일 남짓 됐는데 4㎏ 정도 뺐다. 그래도 여름이니 땀이 난다. 폭염이 심한 날은 더 그렇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헬스클럽에 가서 달리고 근육 운동을 하고 온다. 몸에서 뺄 수 있는 땀을 최대한 빼고 샤워를 하고 다시 글을 쓰려고 시도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글이 써진다. 사실 이 글이 이렇게 해서 쓰인 것이다. 물론 (봐서 알겠지만) 애석하게도 글의 질까지 담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몸은 개운해지고 잡념은 고된 운동으로 휘발된다. 그렇게 육체적 힘도, 딴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저 쓰고자 했던 심플한 아이디어에만 집중해 손가락을 토닥토닥 움직이다 보면 문장이 써지고, 단락이 갖춰지고, 한 편이 얼추 완성된다.

땀의 효용이다. 땀 흘리면 엔도르핀이 분비되니 기분도 나아진다. 힘들게 달릴 때를 떠올려 보면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펜대가 안 움직인다는 고민은 그저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질 뿐이다. 요컨대 ‘문학적 이열치열’을 하는 셈이다.

일찍이 이리하면 될 것을 왜 이제야 시작했을까. 사실 데뷔 초에는 이리 했다. 그래서 소식하고 금주하고 푹 자고 운동 열심히 하는, ‘바르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렇기에 ‘글을 지치지 않고 쓰는 법’을 실은 알았던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게 어렵다. 힘들 걸 아니까. 올해는 폭염이 심하니 어쩔 수 없다. 여름이다. 바르게 살아야겠다.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