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크고 아름다운 협상’에서 살아남기

입력 2025-07-30 00:38

일본이 5500억 달러(약 760조원)를 부르자, 유럽연합(EU)은 6000억 달러(약 830조원)를 불렀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관세 인하를 받아내기 위해 일본과 EU가 각각 약속한 대미 투자 규모다. “묻고 더블로 가.” 영화 ‘타짜’에서 도박꾼이 판돈을 올리는 명대사가 현실의 협상장에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경제 규모가 큰 선진국이라 해도 워낙 천문학적 금액이어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조달할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자할지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세부 협상은 다음 문제다. 관건은 트럼프에게 ‘크고 아름다운 숫자’와 함께 정치적 승리를 선물 보따리처럼 안겨주는 것이다.

무역 협상은 원래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만 해도 2006년 2월 협상 개시 선언을 하고 2007년 4월 타결까지 1년2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90일 안에 무려 90개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주요 무역국과의 협상을 속속 타결하고 있다. ‘프레임워크’라는 이름 아래 큰 틀의 협상 내용만 발표하고 복잡한 세부 협상은 뒤로 미루는 방식이다. 우격다짐 같아 보이지만 트럼프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에 이보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식은 없다.

트럼프는 국내 정치에서 예산과 정책을 단일안에 묶은 초대형 법안을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법안’으로 명명하고 여당을 압박해 통과시켰다. 무역에서도 트럼프의 눈에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협상’만 있으면 된다. 눈에 띄는 어마어마한 수치 강조, 협상 내용을 즉석에서 펜으로 쓱쓱 고쳐 투자 규모를 늘려 버리는 쇼맨십이 트럼프 협상의 특징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격언처럼 무역 협상은 세부 조정이 훨씬 더 어렵지만, 트럼프는 숨은 악마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장 EU 내에서는 “EU는 중국이 아니다. 아무도 민간 기업에 미국에 얼마를 투자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는 반발이 튀어나왔다. 일본에서는 5500억 달러 중 실제 투자액은 1~2%이고, 나머지는 대출이라는 설명도 나왔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문제이지, 트럼프가 걱정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한국 정부도 트럼프의 ‘취향 저격’으로 협상 방향을 잡았다. 정부는 트럼프가 한·미 정상 통화에서 먼저 언급한 조선업 협력과 관련해 트럼프의 정치구호 마가(MAGA)에 조선업(Shipbuilding)을 더한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조선업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구호를 내세우는 것이 너무 저자세 같아 보이지만, 아름답고 단순한 것을 사랑하는 트럼프 취향을 고려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한국이 일본이나 EU만큼 투자 액수를 부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트럼프를 한껏 치켜세워 주고 다음 달 1일로 다가온 관세 부과부터 피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있다.

‘생존하고 전진하라.’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와 협상 도장을 찍은 EU의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다. EU가 보복 관세 등 ‘맞대응’도 가능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교 현안에서 트럼프와 충돌을 피하려고 마뜩잖은 무역 합의를 수용했다는 취지다.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미국 내부 소송과 여러 불확실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단 ‘생존’한 뒤 다음 ‘전진’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막판 초읽기 협상을 진행 중인 한국 정부로서도 참고할 만한 전략이다. ‘마가’든 ‘마스가’든 아니면 더한 신조어가 됐든 일단 생존하고 조금씩 전진하는 것, 트럼프 시대를 사는 각국의 새로운 협상 전략이 될 수 있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