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의사들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필수의료과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의료 소송이 연평균 34건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동안 의료계에선 업무상과실치상죄로 재판정에 서는 의사가 연평균 750여명에 달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정면 반박하는 정부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의료 소송에 가장 많이 휘말리는 진료과목도 필수과가 아닌 정형외과나 성형외과 같은 이른바 인기과인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국민일보가 입수한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의료인 대상) 업무상과실치상·치사 판결문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9~2023년 5년 동안 의사를 상대로 이뤄진 의료 소송 재판은 172건으로, 피고인이 된 의사는 192명이었다. 이 중 치과·한의사 22명을 제외하면 한 해 평균 34명의 의사만이 의료 소송 재판에 서는 셈이다.
이번 조사는 복지부가 올해 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위탁한 ‘국민중심 의료개혁 추진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연구 수탁을 받아 진행했다. 정부 차원에서 의료 소송 관련 통계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는 의료계가 주장하는 “과도한 의료 소송이 필수과 기피 현상을 부추긴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의료 과실이 소송으로 이어진 진료과가 주로 비(比)필수 인기과였기 때문이다. 정형외과(30명)와 성형외과(29명) 의사가 가장 많았다. 필수과로 분류되는 이른바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의사 수(45명)를 모두 합쳐도 위 2개 과를 넘지 못했다.
의료 소송을 제기한 환자·유가족은 회복하기 어려운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 소송의 당사자인 환자 192명 가운데 74명(38.5%)이 사망했다. 116명(60.4%)은 신체적 손상을 입었다. 재판부가 사고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가 없었다고 판단한 사례는 82.3%나 됐다. 환자에게 이상 징후가 발생한 뒤에도 의료진의 팀워크와 의사소통이 원활했던 경우는 9.4%에 불과했다.
의료계에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이 2022년에 발표한 ‘의료행위의 형벌화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근거로 의사들이 과도한 소송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해당 보고서는 검찰 통계를 근거로 업무상과실치상죄로 기소된 의사수가 연평균 752명이라고 밝혔다.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20일 대정부 요구안에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를 논의할 기구 설치를 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폐쇄적인 의사 사회가 자신의 관점과 일치하는 정보만 접하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효과가 소송 위험을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호균 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변호사는 “의료계가 이례적인 몇 가지 사건을 예로 들며 의사가 과도하게 소송을 당하고 있다면서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성근 의협 대변인은 “정부 보고서상 연 34건은 최소 건수로, 이조차도 해외와 비교하면 많은 규모”라고 밝혔다.
이번 정부 통계에는 약식기소·약식명령이 포함되지 않았다. 검찰·법원이 사건이 경미하다고 판단해 재판까지 가지 않은 경우인데 법무부에선 연 10건 내외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약식기소에 불복한 당사자가 정식 재판을 청구한 사례도 위 통계에 집계됐기 때문에 실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