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주주 친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며 임기를 시작했다. ‘왕년의 큰개미’를 자처하는 이 대통령부터 주식 투자 경험이 많고, 주식시장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코스피 5000’을 이정표로 내건 정부에 증시도 ‘허니문 랠리’로 호응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50일 동안 코스피가 약 18% 올랐다. 이 대통령 역시 취임 한 달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주가 상승을 꼽을 정도였다.
주가 상승은 물론 환영할 일이다. 다만 ‘주가주도성장’은 없다. 주가지수는 실물경제의 반사체이지 그 자체가 경제를 추동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코스피 5000 시대로 가려면 결국 기업들의 실적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 현재 실물경제는 어느 지표를 봐도 암울하다. 경제 기초체력이라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은 올해 처음 2% 선이 깨질 것으로 전망되고, 주력 산업들의 업황은 줄줄이 먹구름이 끼어 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으로 돈은 몰리지만 정작 많은 기업은 유동성 갈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새 정부 들어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 등 주주 환원 정책에 힘이 실리면서 기업들의 신규 자금 조달 문이 더 좁아진 모습이다. 이는 기업공개(IPO), 유상증자 등 전통적인 자금 수혈 방식이 ‘공공의 적’으로 취급되는 기류 탓도 있다. 대기업 계열의 IPO는 모회사와 자회사의 ‘중복 상장’ 이슈로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린 상태다. SK이노베이션이 최근 윤활유 사업 자회사인 SK엔무브의 상장 작업을 중단한 것도 중복 상장 논란을 의식한 결과로 시장은 평가한다. 유상증자 역시 상법에 명시된 주식회사의 자금 조달 방식임에도 단기적으론 주가 조정 요인이 되는 까닭에 개미들과 감독 당국의 압박을 감수해야 추진이 가능한 상황이다.
중복 상장이나 유상증자 등은 주주가치 훼손 논란과 함께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원인으로 거론되긴 하지만 개별 기업 상황에 따라 사업 구조 개편이나 신성장 동력 마련 창구로 활용된 측면도 있다. 획일적으로 반(反)시장적 행위라고 낙인찍을 일은 아닌 것이다. 자금 조달 경로가 지나치게 경색되면 기업으로선 신용등급 하락 위험을 감수하고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핵심 자산을 유동화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써야 하는 처지에 몰릴 수 있다.
여권은 이에 더해 기업을 더욱 옥죄는 추가 상법 개정 절차도 밟고 있다. 1차 개정 때 빠진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방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었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 처리도 예고돼 있다. 재계는 해외와 달리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필 등 제도적 방어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더 센’ 2차, 3차 상법 개정이 속도전으로 진행되는 것에 크게 우려를 표한다.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급급해하는 사이 주가 상승의 과실을 외부 투기자본이 빼먹어 갈 염려도 있다. 주가 부양 정책을 쏟아내면서 동시에 기업의 양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우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뒷받침해 다시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정부가 기업을 받쳐주는 게 아니라 기존의 받침대마저 흔들고 있는 건 아닌가.
경제의 근간은 기업이고, 경제 성장의 동력도 기업이다. 현 시점에서 시급한 건 기업의 장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치우고, 기업들이 혁신 투자와 신사업 진출에 필요한 ‘실탄’을 제때 확보할 수 있도록 자금 순환의 길을 터주는 일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공언한 ‘실용적 시장주의’란 이념보다는 시장의 자율성과 기능을 존중하겠다는 뜻 아니던가.
지호일 산업1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