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하원과 슬로베니아 국회가 최근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70%가 넘는 영국인이 해당 법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상원에서의 안락사 허용도 시간 문제로 관측된다. 한국도 80%에 이르는 국민이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자살(조력 존엄사)’에 찬성한다는 통계가 있는 만큼 머지않아 사회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졌다. 종교 신념에 따라 안락사에 반대해 온 교계가 사회의 인식 제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슬로베니아 국회는 지난 18일(현지시간) 조력 사망 허용 법안을 통과시켰다. 앞서 영국 하원도 지난달 20일(현지시각) 생존 말기 환자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에 314 대 291로 찬성에 힘을 실었다. 생존 기간이 6개월 미만인 환자가 2명의 의사와 전문가 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국립보건서비스(NHS)에 안락사를 위한 약물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다만 스스로 약을 투여할 수 있는 환자에게만 안락사를 허용하도록 제한했다.
영국도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까지 법안이 가결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안락사가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될 무렵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73%가 해당 법안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유럽에서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 조력 사망을 허용하고 있다. 호주와 캐나다도 관련 법안이 통과된 상태다.
영국 하원은 안락사 법안 의결에 앞서 낙태 처벌법도 폐기했다. 어떤 경우라도 임신 여성을 낙태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24주 이내 태아만 두 명의 의사 승인이 있어야 낙태를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불법이었다.
영국 교계는 이 같은 법안이 연달아 통과된 해당 주간을 ‘죽음의 주간’으로 규정하고 침통함을 표했다. 특히 이번 낙태·조력자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한 의원이 법안 통과 직후 열린 의회 조찬기도회에서 대표로 기도했다는 일도 전해졌다. 현지에서는 교회가 국민적 애도나 깊은 자기 성찰에 나서는 대신 이 문제가 지닌 반성경적 요소에 무감각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유럽성공회네트워크(ANiE)는 법안 통과 직후 성명을 내고 “의회가 수십 년, 심지어 수 세기 동안 태아 등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보호해 온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고 우려했다.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영국성공회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이 문제를 외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ANiE는 특히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니 교회는 복음에만 집중하고 기독교인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법률센터인 크리스천컨선(Christian Concern) 안드레아 윌리엄스 대표도 “노약자와 취약 계층,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돌봄의 위험에 처해 진 것이 아니라 존엄성이라는 명목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위험에 처해졌다”며 “교회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잃어버렸고 의로움보다 용납을 택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하나님의 진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모든 영역에서 선포돼야 한다”며 “자궁 속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족을 위한 신의 계획을 존중하며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게 기독교인의 부수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주를 존중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도 안락사와 같은 맥락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 국방부장관인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7월 ‘조력 존엄사에 관한 법률안’ 입법을 추진했다. 환자가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해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자는 취지였다. 교계를 비롯한 각계의 반대로 1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한국 역시 영국처럼 조력 존엄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긍정적이라 입법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한국 성인 82%가 찬성하고 있다. 찬성 응답자 중 27.3%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죽음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 생명에 관한 세간의 인식이 성경의 가치와는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존엄사가 허용되면 결국 사회 약자가 피해를 본다고 우려한다. 이명진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운영위원장은 “낙태 문제에 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을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약자인 태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조력 존엄사 또한 신체·경제적으로 취약한 사회 약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사회에 생명 경시 사조가 만연하게 되면 결국 내 생명을 남이 가벼이 여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원장은 또 “안락사 법제화 시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며 “교회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세속적 도전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통증 완화 의술이 발달해 충분히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줄여줄 수 있다”며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저버리지 않도록 교회가 의료 혜택 사각지대의 이웃에 관심을 두고 도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