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현장에서는 정책 취지와 다르게 소비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일대의 피부과 여러 곳에서 소비쿠폰이 미용 시술 할인에 활용되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서는 현금화 시도도 벌어진다. 내수 진작과 영세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정책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27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한 결과 전국 다수의 피부과에서는 ‘소비쿠폰으로 시술 가능’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보톡스, 필러, 리프팅 등의 미용 시술을 홍보하고 있었다. 강남구의 한 피부과에서는 “소비쿠폰과 함께 결제하면 10% 추가 할인을 제공한다”며 “예약이 많아 이번 달 시술 일정을 잡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강남구의 또 다른 의원은 소비쿠폰 사용을 통해 할인된 피부 시술 비용을 문자로 안내하는 등 홍보에 나섰다. 연 매출 30억원 이하 의료기관에서는 ‘비치료 목적의 미용 시술’도 소비쿠폰 결제가 가능해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는 상황이다.
학원가로의 쿠폰 유입은 기준을 재설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세한 소규모 학원뿐 아니라 규모가 있는 입시학원이나 원비가 비싼 이른바 영어유치원 등으로까지 소비쿠폰이 쓰일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0년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약 5조3000억원 규모의 서울 지역화폐 사용액 가운데 23%에 달하는 1조2200억원이 입시학원, 영어유치원, 예술·기능교육 기관 등 학원에 사용됐다. 경남 김해시의 지역화폐 사용처 상위 5곳 중 4곳이 학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올 1~4월 경기지역화폐 사용액은 1조1724억4000만원이다. 이 중 학원에서 결제된 금액은 29.84%인 3498억원, 일반·휴게 음식점에서 쓰인 금액은 27.95%인 3277억원이다. 처음으로 음식점을 추월했다. 학원을 운영하는 이들도 규모와 수입에 따라 소상공인으로 분류할 수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비 진작의 기여도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내수 살리기라는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 정부는 고가 품목 소비처로 주목받는 편의점업계에 ‘고가품 마케팅 자제령’을 요청했다. 행정안전부는 한국편의점산업협회 및 주요 편의점 본사와 간담회를 갖고 “스마트워치 등 전자제품, 외국산 주류와 연계한 과도한 마케팅은 취지에 어긋난다”며 협조를 구했다. 편의점에서는 고가품이 판매되며 물의를 빚은 전례가 있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재난지원금이 지급된 직후, GS25에서의 지역화폐 사용 금액은 전월 대비 최대 214% 증가했다. 축산물, 과일 외에도 스마트워치, 외국산 위스키 등 고가 전자제품과 수입 주류 소비가 급증하면서 논란이 됐다.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이번에는 명절처럼 고가 제품 유통을 늘리는 프로모션을 자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사용처가 제한된 점을 이유로 쿠폰의 ‘현금깡’ 시도도 등장했다. 지난 21일 쿠폰 1차 신청 시작 직후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 등에는 15만원 충전 선불카드를 13만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소상공인을 위한 소비 촉진책이 현금 확보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정부는 지역별 ‘부정 유통 신고센터’ 운영과 온라인 모니터링 강화를 통해 유통 질서 바로잡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행안부는 “쿠폰이 시중에서 실제 소비로 이어지도록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례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제도 목적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할인 혜택으로 쓰이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교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소상공인 매출을 진작시키겠다는 명분으로 만든 제도지만, 실상은 사교육·미용 등 일부 고소득 자영업자에게도 수요가 쏠리고 있다”며 “지역화폐가 할인 혜택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사용처와 가맹 기준에 대한 보다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