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어떤 욕망은 왜 가난마저 욕망하는가

입력 2025-07-28 00:32

강남 아파트·대기업 입사 갈망하는 사회…
초양극화 치닫지 않고 재분배 이뤄지길

지난달 27일 어느 기사를 읽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주택담보대출 6억원 제한을 비롯한 대출 규제안이 발표된 날이다. 상급지 갈아타기를 알아봤다던 기사 속 30대 직장인은 “대출이 최소한 7억~8억원은 나와야 (서울 성동구) 옥수동 같은 곳도 알아보는데, 상환 능력이 있어도 대출을 막으면 자산 늘릴 기회도 없이 평생 가난하게 살라는 건가”라고 말했다.

계획이 틀어져 골치 아프겠다 싶으면서도 ‘대출 최소 8억원’ ‘옥수동’ ‘상환 능력’ ‘갈아타기’ 따위의 말들이 가난과 나란히 놓인 데 이질감이 일었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6억원 이상 대출받는 사람은 전체 대출의 10% 미만 고소득자다. 소설가 고(故) 박완서 선생께서 1975년 ‘도둑맞은 가난’을 발표했는데 가난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건가. 아니면 범위를 확장한 걸까.

1년여 전 인사이동 직후 갈피를 못 잡던 내게 당시 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밌을 거야. 부동산은 한국인들의 욕망이 집결하는 곳이잖아.”

그날 저녁 욕망(欲望)과 욕구(欲求)의 차이가 궁금해 사전을 찾아봤다.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 욕망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했다. 욕망에는 ‘부족을 느껴’란 단서가 붙었다.

부족하다는 느낌은 제각각이다. 무주택자는 ‘내 집이 없어’ 부족함을 느낀다. 유주택자는 “우리 아파트는 저평가됐다. 2억~3억원은 더 올라야 한다”며 부족함을 느낀다. 현실의 체감, 문제의 인식이 다른데 해결의 기준은 어떤 욕망이어야 하나. 욕망 각각의 갈급함이 훅 느껴졌다.

대개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타인 또는 타집단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사회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다. 욕망이자 향상심이다. 그 마음들을 간편히 비난할 수만도 없다.

더군다나 한국은 저출생·고자살로 대변되는, 한국인이 살아가기 척박한 땅이 돼가고 있다.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려는 많은 이들은 서울-아파트-명문대-전문직·대기업을 욕망하며 발 하나라도 걸치려 악착같이 애쓴다. ‘저곳은 안전하다’는 믿음과 그간 체득한 경험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온전히 속된 욕망인가. 절박한 희망은 없는가.

문제는 그 마음(욕망이건 희망이건 향상심이건)이 서울-강남-아파트-서울대-전문직·대기업이라는 획일적·단선적 루트로 귀결되는 사회다. 한 번 나가떨어지면 영원히 뒤처지는 양극화 불평등 사회일 때, 욕망의 다른 선택지나 다음 기회가 없는 사회일 때 누구든 낙오의 두려움에 조급해진다. 그렇기에 어떤 욕망은 ‘가난(이라는 단어)’마저 욕망한다.

이재명정부가 코스피 5000, 서울대 10개 만들기 등을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의 욕망이 머물 곳을 다양화하고 확장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특히 서울 부동산이 국가의 자본을 빨아들여 소비와 생산적 투자는 쪼그라들고, 부동산과 가계부채만 비대해져 경제성장률 전망은 0%대로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서울 강남 아파트 바깥에서도 안전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주식으로 번 돈은 결국 부동산으로 흐른다’는 서울 강남 아파트 불패 신화는 강고하다. 전월세 시장의 불안정과 각종 꼼수, 주식시장에서의 또 다른 거품 등 문제들도 새어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 현 시스템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이들은 현 상태를 지키려 한다. 원대한 목표 외에 체계적 정책들과 세심하고 끈질긴 설명·설득이 잇따라야 한다.

더 나아가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고, 다른 선택을 해도 인간적 삶을 누리는 사회를 ‘욕망’한다. 양극화를 능력주의로 포장해 초양극화로 치닫지 않길, 사회가 지속 가능하도록 자원 배분과 재분배가 이뤄지길 바란다. 이재명 대통령이 “모든 국민의 기본적 삶의 조건이 보장되는 나라, 두터운 사회안전망으로 위험한 도전이 가능한 나라여야 혁신도 새로운 성장도 가능하다”는 취임사 문구를 잊지 않길 바란다.

권중혁 산업2부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