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에서 국내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미국 투자가 유력한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 미·일 관세협상에서 일본이 관세 인하를 위해 5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이후 국내에서도 1000억 달러(137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미국에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차원의 펀드를 마련해 기업들의 투자 여력을 높이는 방안도 보완책으로 검토되고 있다.
24일 통상 당국과 산업계 등에 따르면 한국 협상단은 이번 ‘한·미 2+2 통상 협의’에서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계획을 미국 측에 제안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본래 협의는 25일로 예정돼 있었지만,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날 오전 출국 직전에 협의 취소 통보를 받으면서 무산됐다. 사유는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의 긴급 일정 변경이었다.
대규모 투자계획은 일본의 협상 사례가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23일 상호·자동차 관세 인하를 위해 5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펀드를 제안해 25%로 예고됐던 상호관세를 10% 포인트 낮추고, 자동차 관세도 12.5%(기존 2.5% 포함 시 15%)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일본과 산업·수출 구조가 유사하고, 미국에 비슷한 규모의 흑자를 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도 미국이 한국에 4000억 달러(약 550조원) 규모의 투자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초 미국이 일본에 요구했다는 투자 규모와 같다. 일본과 경제 규모가 크게 차이나는 점을 근거로 해 투자 액수를 낮출 여지는 있지만, 한국도 일정액 이상의 투자 확대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투자 여력을 점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기업들로부터 약속받은 투자 금액은 1000억 달러가량으로 전해진다. 정부 조달자금까지 더해지면 최종 제안 금액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기업 중에는 현대차그룹(210억 달러), 삼성전자(370억 달러), SK하이닉스(38억7000만 달러)처럼 미리 투자 계획을 밝힌 기업들도 있다.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무역보험공사, 한국투자공사(KIC) 등을 통한 정부 차원의 융자나 금융 보증을 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보다 타국의 시장 개방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향후 관세 협상의 변수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서밋’ 행사에 참석해 “시장 개방은 관세율 몇 퍼센트 이상의 가치가 있다”며 “관세는 매우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수동 산업연구원(KIET) 연구단장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금융기관의 기존 보증 프로그램들을 활용한다면 상당한 금액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도 “큰 틀에서는 일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지만, 협의가 미뤄진 만큼 세부 전략은 유연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이누리 기자,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