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3년 넘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반부패 기관을 사실상 장악하는 법안을 ‘날치기’로 승인하면서다. 유럽연합(EU)이 향후 회원국으로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거론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습에 나섰다.
키이우인디펜던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젤렌스키는 23일(현지시간) “법 집행 기관과 반부패 기관이 2주 안에 사법체계 강화를 목표로 하는 공동행동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22일 국가반부패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사청(SAPO)을 검찰총장 산하에 두는 법안을 승인한 직후에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반부패 인프라가 작동할 것”이라며 법안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꿨다.
NABU는 부패 사건 수사를 전담하고, SAPO는 NABU의 사건을 감독하는 기관이다. 두 기관은 2014년 정권 부패에 분노한 수십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퇴진시킨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혁명’을 계기로 설립됐다. 젤렌스키가 이번에 승인한 법안은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 검찰총장이 NABU와 SAPO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부패 기관들이 사실상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것이다. NABU와 SAPO는 공동성명에서 “법안이 우리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제한한다. 독립성과 법적 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명확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며 반발했다.
시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2022년 2월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뒤 처음으로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날까지 이틀째 이어졌다. 참전용사를 포함한 수천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젤렌스키가 전시 상황을 구실로 삼아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판했다. 국제사회도 젤렌스키의 반부패 기관 장악 시도를 지적했다. EU는 “법치주의 존중과 부패 척결은 가입 후보국으로서 핵심 기준이고 이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라며 우크라이나 정부 차원의 해명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주재 주요 7개국(G7) 대사들은 “심각하게 우려한다”는 성명을 냈다.
전시 상황에서 반정부 시위까지 잠재워야 하는 젤렌스키는 2019년 집권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와 휴전 협상도 지지부진하다. 우크라이나는 이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끝난 러시아와의 3차 고위급 평화 협상에서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앞선 두 차례 협상과 마찬가지로 포로 교환 등에 대한 합의만 이뤄졌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