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갑의 문화에 취해 있는 국회

입력 2025-07-25 00:39

의원의 보좌진 갑질뿐 아니라
국회 전반에 甲의 문화 팽배

본회의·상임위 거만한 태도에
산하기관에 무리한 요구 빈번

'선출 권력' 우월성 내세운 탓
전 구성원이 갑질 근절 나서야

예전에 국회를 업무차 출입하던 이가 했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는 “국회만 오면 갑갑한 느낌”이라고 했다. 뭐가 갑갑하냐고 물었더니 그 갑갑이 아니라 국회가 온통 갑갑(甲甲)투성이라는 것이다. 국회 들어가는 절차부터 시작해 의원실이나 상임위에 출입 허락받고, 보좌관이나 국회 직원 만나고 설명하고 나와서 정문을 나서기까지 전 과정이 을(乙)의 입장에서 큰 고통이라는 것이다. 국회에서 먼저 전화라도 걸려오면 곧바로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고 한다.

갑질이 없는 곳이 드물겠지만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국회는 그 정도가 가장 심한 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국회의원이 보좌진한테 갑질하는 것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숱한 갑질 중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의원들이 본회의나 상임위원회 회의에 출석한 행정부 관료들한테, 청문회에 나온 참고인과 증인들한테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 말 자르고 면박 주고, 때로는 반말과 막말을 하는 것에 비하면 연성 갑질일 수 있다.

그런데 의원들만 갑질을 할까. 보좌진이 산하기관을 대하는 방식은 신사적일까. 그들이 의원을 대신해 산더미 같은 자료를 요구하고, 국회로 사람 오가게 만들고, 산하기관에 이것저것 민원을 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갑질도 엄청날 것이다. 국정감사 때나 청문회 때 ‘묻지마’ 증인 채택 갑질도 빼놓을 수 없다. 출판기념회에 오가게 하는 것이나 후원 독촉은 갑질 축에도 끼지 못한다.

우리 국회는 거대한 갑의 왕국처럼 보인다. 의원이나 보좌진의 품새 구석구석에 갑의 문화가 팽배해 있다. 갑질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국회 사무처도 갑의 지위이긴 마찬가지다. 상임위 소관 정부 부처나 기관들은 사무처 사람들에게도 납작 엎드린다. 어쩌면 국회 의원동산에 있는 청설모도 대한민국 최고의 갑 청설모일지 모른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개헌 못지않게 급한 게 국회의 갑질 문화 청산이다. 의원이 보좌진에, 의원이나 보좌진이 산하기관에, 국회사무처가 행정부 공무원에게 대하는 갑의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국회를 오가는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쭈뼛쭈뼛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문화인데 거기에 더해 갑질까지 해선 안 된다. 민원인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서 서비스 정신이 가장 없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 국회가 1위일지 모른다.

그 갑의 문화가 국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의원들이 생중계되는 본회의와 상임위 회의에서 소리 지르고 모욕적으로 출석자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인터넷을 타고 ‘버럭 바이러스’로 변해 온 나라를 품격 없는 사회로 감염시킨다. 강선우 의원 갑질 사태가 터졌을 때 더불어민주당이 “의원과 보좌진은 너무 가깝고 동지적 관계이기 때문에 일반 직장 내 갑질과는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문제는 그들의 동지적 갑질이 의원실 밖으로도 스멀스멀 퍼진다는 점이다.

갑의 문화는 결국 국회의 특권과 연결된다. 국회는 그동안 스스로를 ‘선출 권력’이라며 과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남다른 대접을 요구해 왔다. 의원에게는 보좌진을 언제든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인사권도 있다. 국회가 과도한 자료 요구나 ‘묻지마’ 증인 채택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최근 문재인정부 여성가족부 장관이 폭로한 대로 개별 의원의 보복성 ‘예산 갑질’을 견제하기도 어렵다. 의원이 본회의나 상임위의 면책특권 뒤에 숨어 온갖 모욕을 줘도 문제삼기 어렵고, 설사 의원들의 처신이 문제가 돼 국회 윤리위원회가 열려도 자기 식구들한테는 눈 감아주는 문화가 팽배하다. 개인 차이도 있겠지만 의원만 되면 대부분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지고, 삿대질이 나오고, 점점 더 우격다짐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국회에 들어오는 순간 치명적인 갑의 약물에 취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국민들이 ‘국회 갑질 방지법’을 통과시킬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국회 스스로 자정의 노력을 통해 잘못된 문화를 싹 바꿀 도리밖에 없다. 자신들만 그런 문화를 즐기면 상관없는데 그런 나쁜 문화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너무 크다. 아마 국회 구성원 스스로도 너무 자주 갑이 돼 있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랄지 모른다. 강선우 의원 사태를 계기로 국회 구성원 모두가 환골탈태하기 바란다. 바꿀 계기인데 바꾸지 못하고 예전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을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