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한 경제부처 간부는 “트럼프가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쓰고 있다”며 혀를 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반년이 지났는데 미국 경제가 생각보다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식 관세 폭탄은 경제 당국자로선 상상도 못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트럼프 취임 초기만 해도 미국도 머지않아 치명상을 입고 한발 물러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근거도 다양했다. 관세 부과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과 교역 축소에 따른 경제 후생 감소, 미국 내 생산·고용 위축까지 복합적이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미국의 물가와 고용 시장은 아직 안정적이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5월 기준 2.4%로 1월(3.0%)보다 여전히 낮다. 이달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도 3개월 만에 최저치였다. 일본에 이어 유럽연합(EU)까지 미국의 관세 압력에 굴복할 기색을 보이자 ‘트럼프가 맞았다’는 말까지 나올 분위기다. 트럼프 경제 책사이자 관세 이론의 창시자인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관세에 따른 물가 상승은) 팬데믹이 오거나 지구에 운석이 떨어질 확률”이라며 의기양양했다.
이론과 현실이 맞지 않을 때는 어딘가에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미국 물가 안정은 트럼프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세계 각국과 기업의 인위적 노력의 산물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한·일 완성차 업체를 비롯한 대미 수출 기업은 관세 상승분을 미국 판매 가격에 반영하지 않고 떠안고 있다. 아마존은 상품 가격에 관세율 표시 방안을 검토했다가 백악관의 질타에 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대적 엄포와 달리 관세 부과 유예를 거듭하고 있다. 트럼프식 경제학의 본질은 피해는 남에게 떠넘기거나 뒤로 미루고, 성과는 부각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아무나 이론을 뒤흔들 수는 없다. 이런 결과를 얻으려면 먼저 권력자가 쥔 위상이 강력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엄청난 중력으로 시공간까지 왜곡하는 블랙홀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 경제학 이론을 뒤틀 수 있다. 권력의 끝에 가까워졌거나 힘이 없는 권력자는 이론도 현실도 바꾸지 못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겠다며 위헌적 비상계엄을 선택했지만 결과는 치명적 역풍이었다. 계엄 선포 일주일 전 그의 지지율은 19%(한국갤럽)에 불과했다. 트럼프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관세 속도전을 펼치는 것이리라.
정권 교체 이후 한국도 경제 정책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다. 출범 두 달을 앞둔 이재명정부는 높은 지지율과 절대적 국회 의석수에 힘입어 지난 정부의 경제 정책을 뜯어고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 정부의 감세 정책이다. 기업이 내는 법인세를 낮추면 투자와 고용이 늘며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나타난다는 게 전 정부가 제시한 이론이었다.
반면 이번 정부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며 법인세를 원상복구하고 민생 재원을 늘리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그냥 감세를 해주면 기업이 투자를 늘린다는 식의 정책은 깊이 있는 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수 진작 효과가 없다며 전 정부가 반대한 지역화폐는 최근 화려하게 부활했다. 코스피 5000 꿈을 향한 상법 개정안도 속속 국회 문턱을 넘고 있다. 지난 정부가 가장 먼저 가로막았던 양곡관리법(쌀값이 일정 이하 떨어지면 정부가 초과량 의무 매입)도 국회 본회의 문턱을 앞두고 있다.
경제학은 하나의 학문일 뿐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세상이 경제 이론대로 돌아간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이론이 정론인지와는 별개로 정부 정책이 경제 성장과 민생 회복으로 이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이 만든 ‘현실 왜곡’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미 미국 법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조치에 위법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법원이 관세를 일시 유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지만 얼마든지 상황은 바뀔 수 있다.
트럼프 관세 정책이 재평가를 받는 시점은 그의 임기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재명정부도 곧 세제 개편과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내년도 예산안 등을 잇달아 공개한다. 단기 성과라는 덫에서 벗어나 중장기 미래를 고려한 정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론과 현실의 조화도 경제학 교과서 속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