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품의 주제가 특정 종교와 연관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종교문학이라 부른다. 신라시대의 향가나 일제강점기 한용운 시에 나타난 불교적 성격, 김만중 소설 구운몽에 보이는 유불선적 성격,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에 드러난 기독교적 성격 등 종교적 주제의 형상화에 집중한 작품은 모두 종교문학의 범주에 귀속된다. 이처럼 종교문학이라는 명명은 문학이 끊임없이 종교와 교섭해왔다는 확연한 증거가 되어준다. 그 가운데 기독교문학은 문학이라는 양식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된 경우를 말한다. 결국 기독교문학은 기독교 정신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는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폭넓은 기독교적 전통 아래 태어난 서양문학은 거의 기독교문학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지만, 한국 기독교문학은 그 역사가 매우 짧고 서양에 비해 작가나 작품의 실례 또한 상대적으로 적다. 조금 과장하면 서양문학은 그 자체로 기독교문학이요, 한국 기독교문학은 작가가 매우 특별한 자의식을 가지고 창작한 경우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여기서 기독교 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랑과 동행, 구원의 역사를 작가 자신의 경험과 결합해 형상화하는 사유와 의지를 말한다. 신의 창조 질서에 어긋난 세속의 역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여기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정신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사유하는 한편 그것을 해결해가는 방식을 세속적 합리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적 경험에 의한 극복 의지로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 소명 희생 부끄러움 죄의식 종말 실존의식 등이 작품의 세목이 된다. 우리가 읽게 될 잘 알려진 걸작들이나 숨겨진 기독교문학 명편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규정을 충족한다.
종교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를 인간 문화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의 안목은 종교가 언어라는 창조력에 힘입어 체계화된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인간의 문화 활동에 의해 그 부침을 거듭해온 종교 역사를 떠올릴 때 매우 정당한 것이다. 종교가 한 시대의 문화적 양식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온 사실을 감안한다면,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각별한 상호 관계를 타당성 있게 지적한 셈이다. 이처럼 역사 이래로 종교와 문화는 상호 보완적 관계 아래 존재해왔다. 이러한 종교와 문화의 관계는 한국 기독교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 이후 이 땅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데에는 수많은 희생의 역사가 있었고, 기독교 유입 역사를 통해 우리는 초유의 문화적 갈등과 진보의 토양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실 가운데 중요한 것이 기독교의 성장과 더불어 형성된 한글 보급, 문학 창작의 흐름일 것이다. 이제 선교 150년이 가까운 시점에 한국 기독교문학은 양과 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고 있다. 서양문학에서처럼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 성과와 가능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기독교문학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값에 대해 깊이 묻고 따지는 데서 발원하는 언어적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성찰하는 시선이 절대자를 향해 확장되어가는 회로를 가진다. 이때 그 힘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서 비롯한다. 기독교문학이 이성적 합리주의와 영성적 초월의 경계선을 부단히 오가야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문학의 과제가 신의 침묵을 질문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신이 역사 안에 직접 현시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는 신의 모습을 어떤 각도로 묘사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 김은국의 ‘순교자’ 등에서 만나볼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기독교문학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인용한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신이 부재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우리는 일종의 ‘지성적 경건’을 견지하면서 창작된 세계문학사의 기독교 고전들 가운데 유명한 작품도, 가려졌던 작품도 새롭게 만나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