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오래된 거짓말

입력 2025-07-25 00:34

끊임없이 진실 은폐하려는
정치권력… 이들을 견제할
민주주의를 시민이 만들어야

선생으로 산 지 벌써 15년이 됐지만 학생들을 훈계하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 학생이 잘못한 것을 깨달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답한다면 뭐가 그리 어려울까. 열의 두셋은 잘못이 명백한데도 인정하지 않고 남 탓을 하거나 몰라서 그랬다고 잡아뗀다. 선배 동료는 그럴 때 따끔히 혼을 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나는 선생으로 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학생 앞에 혼란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는 그는 선생을 속이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을 속인 것일까. 거짓을 말하는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독심술이라도 부리고 싶다.

선생만 속이는 것이라면 확실한 증거를 찾아 학생의 거짓을 드러내면 되기에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속인 것이라면 그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 세계 전체가 어그러진 것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선생으로 가장 무능한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일 것이다. 자신을 속이며 말하는 진술 앞에 나는 “너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니?”라고 속으로 말을 삼키지만, 이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라는 책임질 수 없는 걱정을 하고 만다.

여러 증언과 확실한 물증이 있는 상황에도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음모론으로 부인하는 자들이 특검 조사실과 법정, 그리고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섰다. 나는 그들 대부분이 검사와 재판관을, 청문위원과 국민을 ‘의도적으로’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뻔뻔한 얼굴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 자에게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고 자부하며,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음껏 누렸던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자 민주주의라고 확신해 온 자에게서 보이는 얼굴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에서야 일부러 남을 속이려 그곳에 선 사람이 아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속여온 사람들이다. 거짓말쟁이가 “정치판에 나갈 때 정치판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그들에게 거짓말은 취미이자 습관이었으며, 생존 방식으로서의 처세술이자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였다.

그런데 특검과 재판, 인사청문회는 그들의 거짓된 삶을 낱낱이 진리의 빛 아래 밝힐 수 있을까.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뻔뻔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판에 제시된 수많은 문서와 증언이 그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은 정치권력이 아무리 진실을 은폐하려고 해도 진리 자체가 단호한 안정성을 갖추었기에 거짓말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끝내 완전히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에 이르게 했다.

아렌트가 목격한 것이 지금 이곳에서도 이뤄질 수 있을까. 나는 아렌트의 궁극적 믿음이 내 것이 되고, 내 딸의 것이 되길 바란다. 아렌트에 의하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전선동의 정치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시민이 직접 만들어야 한다. 타자와 함께 말하고 행동하며 인간 세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말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민주주의, 즉 내 편과 남의 편으로 양분되어 권력을 주고받아 왔던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자기 편의 잘못을 부인하고 은폐하는 정치인의 아비투스로 재생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쉽게 낙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크 데리다는 “거짓말의 무한 생존 가능성”을 언급하며 “거짓말의 결과가 오래갈 수 있다”라는 사실을 강조했다(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이숲, 2019). 그러니 특검과 재판관에게 모든 진리를 드러낼 책임을 미뤄둬서는 안 된다. 진리를 독점하려는 욕망, 그것이 권력에 본능처럼 깃들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혜령
이화여대 부교수
호크마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