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 품격을 드러내는 건 없다. 공직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한 권의 책이 떠오른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이다. 청문회의 본래 목적은 전문성과 자질 검증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시선을 붙든 건 전혀 달랐다. 그들이 걸어온 관계의 언어, 말의 온도, 태도의 결. 누군가는 학문적 정직성에 의문을 샀고, 누군가는 주변을 대하는 언행으로 물의를 빚었다. 스펙은 빛났지만 그들이 맺어온 관계에는 울림이 부족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부속처럼 다루는 풍토. 효율과 통제로 관계마저 재단하는 시대. 그 안에서 우리는 묻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품격의 시작 아니겠는가.
공직이든 학문이든 일터든 마찬가지다. 관계가 명령과 복종의 구조에 갇혀 있다면 그 공동체는 겉만 번듯할 뿐 속은 비어 있다. 품격 있는 공동체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동역자가 있는 곳이다. 함께 진리를 탐구하고 나누는 벗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오늘의 사회에서 점점 귀해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비즈니스의 계산과 소비의 언어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길에 오르며 탄식했다. “친구들이 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고난이 닥치자 벗들은 연락을 끊었다. 이용할 수 없으니 버린 것이다. 반면 공자는 말했다. “친구란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다.” 벗은 함께 성장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이지 소비하고 교환하는 대상이 아니다. 품격은 바로 그 존중과 신뢰의 언어에서 비롯된다. 정치와 학문, 교육과 공직이 ‘언약의 언어’를 잃고 ‘거래의 언어’만 남았다면 아무리 이력이 빛나도 내면의 무게는 이미 무너진 것이다.
출애굽기의 바로왕은 품격의 상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사람을 벽돌처럼 여겼다. 관계는 생산성의 부품이 됐고 이름은 지워졌다. 목적 없는 반복노동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서서히 파괴됐다. 바로의 제국은 사람을 소비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며, 관계를 가격으로 환산하는 ‘빅 미(Big Me)’ 사회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제국 바깥에서,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브룩스는 말한다. 모세가 ‘리틀 미(little me)’로 낮아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고. 하나님은 그를 힘의 상징이 아닌 약함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수단으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친구처럼 대하셨다.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안다”는 언약의 말로.
품격이란 이런 것이다. 지위나 능력 이전에 타인을 대하는 말과 태도,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인격의 깊은 울림이다. 사울왕은 다윗을 ‘쓸모’로만 봤다. 그래서 내칠 때도 주저함이 없었다. 반면 요나단은 다윗과 영혼의 언약을 맺었다. 자기의 옷과 칼, 심지어 왕위 계승권까지 내어줄 정도로. 소비의 관계와 언약의 관계는 이처럼 다르다. 전자는 품격을 허물고, 후자는 품격을 세운다.
요즘 대한민국의 풍조는 사람을 동지가 아니라 소모 가능한 자원처럼 여기는 듯하다. 어쩌면 그래서 낭만이 사라지고 관계의 품격도 희미해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사회 구조를 뿌리째 전복하는 새로운 품격을 우리 앞에 내민다. 예수는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셨다(요 15:15). 영적 우정은 십자가라는 언약으로 완성됐다. 그 품격은 따뜻한 손을 내밀 줄 아는 이에게 오늘도 다시 주어지리라. 그런 언약과 품격이 사라진 사회라면 교회라 해도 더는 공동체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기능과 효율로만 연결된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지탱하지 못한 채 흩어지는 군중에 지나지 않을 테니.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