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약자 도우려 구세군 사관 돼 돌아왔죠”

입력 2025-07-24 03:03
소완 메따 사관이 지난 21일 캄보디아 프놈펜 영문에서 삶과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캄보디아 프놈펜 스텅미언체이의 한 빈민가. 한때 도시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곳은 많은 이들이 깡통 등을 주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끼니를 놓치고 좁은 골목을 서성이던 아이들이 지난 21일 점심시간에 앞서 한 교회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한 작은 택시)을 놀이기구 삼아 뛰놀면서 ‘까르르’ 소리 내며 웃었다. 13년 전 한국 구세군이 세운 프놈펜 영문(교회)은 지친 이웃들이 잠시 시름을 잊고 마음 편히 머무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117년 역사의 한국 구세군사관학교에서 졸업한 최초의 외국인 사관인 소완 메따(34) 부담임사관이 이 안식처를 지키고 있다. 메따 사관은 이날 프놈펜 영문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하나님을 만나기 전 저는 이곳의 고달픈 삶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며 “이젠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좌절하는 10대 소녀들, 꿈 없는 청년과 소외된 어르신들을 섬기고 싶다”고 고백했다. 간호사였던 경험을 살려 이들을 위한 진료소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다.

메따 사관이 처음부터 이웃의 아픔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가족 부양 책임이 무거웠던 그는 군 병원 3교대 간호사와 한국어 강사를 겸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교회 출석은 한국 유학을 위한 현실적 수단이었다. 그는 “솔직히 처음 교회에 나온 건 한국어 실력을 늘리고 유학의 기회를 잡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메따 사관이 프놈펜 빈민가 가정을 방문해 이야기 나누는 모습. 한국구세군 제공

간호사 시절 만난 한 10대 소녀가 그를 하나님께 인도했다. 그는 “의무실에서 만난 열여섯 소녀는 ‘4개월째 생리가 없다’며 울먹이며 도와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막막한 마음에 조언했지만 실패했고, 아이는 곧 사라져 버렸다”며 “그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무력감이 제 마음에 깊은 부채감으로 남았다. 그때 하나님께 일하는 소녀들을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한 소녀의 비극을 넘어, 꿈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의 현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 영문에 나오는 청년 50명 중에 자기 목적을 아는 친구는 10명도 채 안 된다”면서 “나머지는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거나 사회 분위기를 따라 공부할 뿐, 자기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메따 사관이 이웃을 위한 사명감이 커질 무렵, “구세군 사관이 되겠느냐”는 제안이 찾아왔다. 그는 사관의 책임이 무거워 주저했지만 결국 그를 이끈 것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기도였다. 그는 “2018년 청년 수련회에서 ‘한국에 유학 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편지를 쓴 뒤 잊고 있었다”며 “3년 뒤 주일학교 교사 제안이 왔을 때, 그 기도가 떠오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사관학교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훈련은 부푼 기대와 달리 외롭고 고된 시간이었다. 구세군에 대한 이해도 다른 한국인 사관학생들에 비해 부족했고 공부량을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포기 직전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훈련의 일환으로 잠시 방문한 고향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캄보디아 청년들을 보니 제가 포기하면 다음세대의 길이 막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책임감이 저를 끝까지 붙들었다”며 웃었다.

빈민가 아이들이 프놈펜 영문 마당의 툭툭에 오르내리는 장면. 한국구세군 제공

국민 다수가 불교를 믿는 캄보디아에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반대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메따 사관은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쁜 사람이 되면 나무라셔도 괜찮다. 그런데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까지 도울 수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고 부모님을 설득했다”며 “눈물로 기도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제 길을 축복해 주셨다”고 전했다.

13년 전 한국 구세군이 뿌린 씨앗은 생존을 고민하던 한 인간을 ‘스스로 일어서는 리더’로 키워냈다. 왕립 프놈펜대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군 간호사였던 그에게는 캄보디아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길이 있었다. 한국에 가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길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따라 기꺼이 가난한 이웃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메따 사관은 “이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의 손을 직접 잡아주는 것이 저의 진짜 기쁨”이라고 말했다.

프놈펜=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