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이라는 책을 통해 거짓된 종교적 희망이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는 신앙의 정공법으로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하나님을 재해석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겪는 예수는 곧 하나님이다. 성자 예수가 완전한 인간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겪을 때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부 하나님도 독생자 예수의 고난에 함께 아파하시고 고통받으셨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는 예수를 통해 인류의 고통 속에도 하나님이 현존함을 깨닫게 했다.
당시 서구 유럽은 과학혁명 및 산업혁명과 더불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정치사회학적인 진보를 통해 곧 유토피아가 세워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이 타락한 죄인임을 망각했고 결국 악한 자들의 세상이 그대로 발현됐다. 모든 인류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바로 그 고난을 뚫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한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었다.
그 고통의 신음은 비참한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유럽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나무들이 소리를 지르고 공장의 폐수로 오염된 바다가 신음을 내며 도시를 만들겠다고 메워지고 깎인 산하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이 타락한 존재의 본연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인간이 파괴하고 착취해 슬피 울게 만든 창조세계를 보면서 인간은 자신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도 결코 지켜낼 수 없는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임을 철저히 인식했다.
천국은 인간들만 모여 강강술래를 하며 행복해하는 곳일까. 인간은 다 알 수 없으나 성경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 천국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일컬어 온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곳이라고 증거하며(시 148) 승천하신 예수는 하늘에 계시되 만물을 회복하신 후에야 다시 오신다고 말한다.(행 3:21) 예수의 재림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충만하신 예수를 인간에 의해 상처 입은 모든 만물에까지 전하고 회복시킬 때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 이 땅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곳곳에서 홍수로 인해 목숨을 잃고 산불로 수많은 가정이 집과 가족을 잃었다. 매년 변하는 기후변화 속에 더욱 강력해진 태풍과 허리케인은 인류를 위협하고 극심해지는 폭염과 가뭄은 분명히 이 땅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만물이 회복하는 때가 예수 재림의 때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모든 피조물의 신음은 더 자주, 더 가까이, 더 많이 들려올 것이다.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산을 깎고 연못을 메워 건물을 지었던 교회들은 회개해야 하고 주일 점심 때마다 남은 음식을 몇 t씩 버리는 성도들 역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저 멀리 오지 선교의 시작은 우리 앞에 놓인 밥상 앞에서 시작됨을 깨달아야 하고 녹색교회를 위한 아주 작은 실천이 곧 땅끝까지 이르라는 복음의 사역임을 이제는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가 태어날 때 아무도 요셉의 가족을 받아주지 않아 그들은 마구간을 겨우 찾았고 아기 예수를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 눕혔다. 그리고 예수는 공생애 전에 목수였다.(막 6:3) 그의 삶에 나무는 항상 곁에 있었다. 마지막 때에도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봐 주고 그의 무거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 준 것은 나무 십자가였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가 병을 고쳐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가난한 이들도,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온몸으로 삶을 나눴던 제자들도 예수의 마지막엔 함께하지 않았다. 예수의 처음과 끝을 지켜준 것은 나무, 곧 인간이 아닌 자연이었다.
예수를 통해 구원을 소망하는 인간은 나무에 빚진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피조세계를 보전하고 보호하는 것은 환경을 보존하라는 율법적 신앙 때문이 아니다. 인간 대신 예수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준 나무를 향한 미안함과 빚진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창조보전의 신앙이다.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넘어 이제 세상을 보는 신앙이 필요한 때다.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