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고정희 (5) 개척한 교회 운영 위기… 월세 밀려 밤엔 대리운전까지

입력 2025-07-25 03:04
고정희(윗줄 왼쪽) 선교사가 2000년 개척교회 사역 시절 부활절을 맞아 남편 이성로 목사, 자녀들과 기념촬영을 한 모습. 고 선교사 제공

사랑하게 되면 상황과 환경을 개의치 않고 올인하게 된다. 학생 신분에 결혼했으니 삶이 힘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진한 사랑의 향이 은은히 퍼졌기 때문에 그렇게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포기했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들어오는 물질을 모아 써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교회 오빠는 성악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신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시부모님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결혼해도 되는지,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을 두고 고민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계산 없이 순종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 부부는 개척교회를 섬기게 됐다. 그런데 음악을 전공한 남편에게 큰 교회 지휘자 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그 교회는 사례비도 적지 않게 줬고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곳이었다. 반면 개척교회는 우리 부부가 앉아 있기만 해도 힘이 되는 교회였다.

갓 결혼한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첫 단추부터 잘 끼고 싶었다. 남편은 “지휘자 자리는 갈 사람이 많지만 개척교회는 우리가 없으면 안 되니 이곳에 있자”고 했다. 왜인지 남편이 고마웠다. 사실 남편이 나하고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주위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음악 전공자인 남편에게 나는 초라하고 가진 것이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남편은 내 편이 돼 줬다. 아들 연종이와 딸 은송이를 열매로 주셨다.

몇 년 후 어린 자녀와 함께 상가 2층에 교회를 개척했다. 자녀들을 키우며 선교원도 운영했다. 상가 건물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엔 추웠다. 어린 자녀들과 지내기도 벅찼는데 어느새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이 상가 앞에 먹고 내놓은 자장면 그릇을 핥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꾸짖었지만 사실 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다. 월세가 밀린 교회를 안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밤에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내게 미안해서 결정을 못 하고 있었는데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교회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회음악을 공부한 사역자가 많아지고 있을 때였다. 밤마다 대리운전하며 땀범벅으로 돼서 돌아오는 남편이 불쌍했다.

메마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 가족은 따뜻한 방 하나로도 감사했다. 파트 사역을 하는 남편에게 사례비가 주어지면 재정의 일부를 가지고 마트를 갔다. 무엇을 사서가 아니라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아들은 자라면서 한 번씩 그때의 이야기를 했다. 아마 아이들도 힘이 들었나 보다. 하나님은 이 시절을 진한 추억으로 남겨 주셨다.

대학원을 졸업한 남편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 음악 목사로 사역의 여한이 없이 살았다. 그런데도 늘 목말라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닌 것 같았다. 남편은 “이렇게 살다가 지옥에 갈 것 같다”고 했다. 2008년 여름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다시 십자가 복음 앞에 세워주셨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