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머문 낡은 성경 ‘새 옷’ 입혀 다시 은혜를 읽다

입력 2025-07-26 03:00
장명근 장로가 아버지의 가방 가죽으로 리폼된 성경을 들고 웃고 있다. 수선 작업을 위해 해체한 장 장로의 아버지 서류 가방. 김사영씨가 리폼 성경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왼쪽 사진부터). 게티이미지뱅크, 하프타임크래프트 제공. 그래픽=강소연

박장일(49)씨가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을 들고 서울 성동구의 한 가죽 공방을 찾은 건 지난해 봄이었다. 그는 공방 주인에게 성경 한 권을 꺼내 보이며 “이 책엔 어머니의 오랜 신앙과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종이처럼 너덜너덜한 겉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2001년 1월 7일’ 날짜가 손글씨로 선명히 적혀 있었다. 수십 번은 될 듯한 필사의 흔적과 형광펜 밑줄, 여백 가득한 메모, 손때 묻은 자국까지. 그의 말대로 성경책 곳곳엔 어머니 세월이 남아 있었다.

낡을 대로 낡았지만, 어머니는 버리지 못했다. 책장에 고이 보관되다 명절 가정예배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코로나19 시기 아버지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쓰러진 급박한 순간 어머니 손엔 그 성경이 들려 있었다. 박씨의 동생 부부가 새 성경을 선물해도 어머니는 낡은 성경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에 익은 게 좋다”는 어머니의 말에 박씨는 성경책 리폼을 결심했다. 방법을 찾던 중 들어가게 된 곳이 ‘하프타임크래프트’라는 이름의 작은 가죽 공방이었다. 이곳에서 리폼을 마친 성경은 지금도 어머니의 신앙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박씨는 “새 책을 사는 것보다 비용은 더 들었지만,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어머니가 하나님과 함께 보낸 시간을 이어가는 일이기에 의미가 컸다”면서 “외할머니의 성경을 어머니가 물려받았듯 나도 언젠가 이 성경을 이어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의 리폼 의뢰는 개인적이었지만, 그 영향은 박씨를 넘어섰다. 공방 주인장 장우석(52) 대표는 그 작업을 계기로 공방도, 자신도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공방 이름 ‘하프타임크래프트’의 의미대로다. 최근 공방에서 만난 그는 “축구에서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하프타임처럼, 나도 인생의 중간 시점에서 새로운 후반전을 준비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원래 게임회사에서 디자인과 기획, 제작을 담당하던 그는 40대 후반에서야 취미로 가죽 작업을 시작했다.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을 거치며 지금의 공방을 연 건 3년 전이다.

친정어머니의 유품 성경 수선을 맡긴 손님이 보내온 손편지.

박씨 작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성경 리폼을 한 지는 1년 남짓.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지난해 6월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상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스타그램에서 키 191㎝의 ‘키 큰 공방장’으로도 불리는 장 대표는 공방 작업 영상이나 고객 사연에 음성을 입힌 콘텐츠를 올려 왔었다. 그런 그에게 ‘하프타임크래프트님께’라고 적힌 손편지가 전해졌다. “친정어머니께서 사용하는 성경책을 맡긴다. 새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성경이라 버릴 수 없었다. 많은 업체가 있지만 귀사의 작업 영상을 보고 믿음이 생겨 맡긴다”는 편지 속 사연을 담은 영상은 200만뷰를 넘길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이후 성경 리폼 문의가 급속도로 늘었다. 이후 장 대표가 리폼한 성경만 300권에 달한다.

공방의 하루는 정오가 되기 전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이어지는데, 성경 리폼은 하루에 많아야 두 권 정도 작업할 수 있다. 때에 따라 한 권 작업에 이틀 이상 걸리기도 한다. 책등 보강, 세양사·꽃천·가름끈 교체 등 정성스러운 작업이 이어지지만 고난도 공정이라도 추가 비용은 받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많은 성경이 내 손에 맡겨졌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작업 중 접하는 사연을 통해 마음이 움직일 때면, 직업을 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처럼 여겨진다”는 고백이 그 이유다. 그는 “합성피혁 성경은 시간이 지나면 가루처럼 부스러진다”며 “신앙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을 오래 보존하고자 리폼을 맡기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공방을 찾는 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장명근(66) 정동제일교회 시무장로는 아버지 유품인 서류 가방으로 자신의 성경을 리폼한 경우다. 그 서류 가방은 1960년대 초 독일 출장 중 구입한 고급 소가죽 가방으로, 회사 경영자였던 아버지가 출장 때마다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장 장로는 “어느 날 아버지가 이 가방을 보여주며 어려웠던 시절과 영광스러운 순간의 추억을 얘기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의 희생과 가족의 생계를 동시에 짊어진 물건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장우석 대표의 성경 리폼 작업 모습.

그가 2년 전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성경 리폼을 떠올린 건 그런 의미 때문이었다. 직접 해체한 가방 가죽을 들고 공방에 의뢰해 새 성경으로 되살렸다. 검정 가죽 표면에 붉은 모서리 마감, 은색 ‘BIBLE’ 문구를 새겨 다시 태어난 성경책은 “마치 아버지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장 장로는 말했다. 그는 이 성경을 개인 서재에 두고 성경공부와 묵상을 위해 아침저녁 펼친다. 성경책 안 여백엔 묵상 메모와 설교 노트도 남긴다. 좋은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싶어서다. 장 장로는 “아버지도 같은 교회 장로셨다. 이 성경을 통해 아버지의 신앙과 온기를 느낀다”면서 “우리 가정의 유일한 다음세대이자 하나뿐인 딸에게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80대 할머니가 리폼된 성경을 받고 남편과 함께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고 기도하는 영상을 보내온 적도 있다. 그 영상엔 “성경을 받고 나서 파티를 열었다”는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장 대표는 “그 감사와 축복의 표현이 너무 귀하고 감동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지방에서 직접 공방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전 창원 부산 등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낡은 성경을 들고 오는 이들 대부분은 돌아가신 가족의 유품을 지키거나 자녀에게 믿음을 물려주고 싶어했다. 대구에 사는 김사영(55)씨는 “신앙의 흔적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자녀에게 전해줄 날을 기대한다”며 책이 허물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성경의 리폼을 맡겼다.

장 대표는 “그런 책은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이게 된다”며 “저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성경을 새로 사서 요즘 열심히 읽고 있다”고 했다. 성경 안에 손편지를 동봉해 보내오는 이들도 많다. 요청사항뿐 아니라 성경을 물려주는 마음, 사랑하는 이와의 추억 등이 가득하다.

장 대표는 “요즘은 연애편지도 손으로 잘 쓰지 않는데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잊고 싶지 않다”며 “리폼 의뢰와 함께 보내온 편지는 모두 종이 파일로 따로 모아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많은 성경과 그와 연결된 사연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신앙도 깊어질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성경도 종이책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이나 스크린으로 보는 시대잖아요. (리폼 덕분에) 처음으로 성경책을 이렇게 가까이, 오래 볼 수 있었어요. 손때 묻은 성경에서 묵상 흔적과 위로의 말씀을 발견할 때마다 저 역시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준 성경 구절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으냐”면서 “우리 안에는 성경에 근거한 자신감과 믿음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고도 했다.

장 대표는 단순한 리폼을 넘어 복원 작업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그는 “진짜 오래된 성경 중 복원하고 싶은 책들이 있다”면서 “누군가의 신앙 여정이 담긴 책을 원형 그대로 다시 살려내는 일을 할 기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길 소망한다”고 했다.

“리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신앙의 흔적을 보존하고 믿음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소명 같은 일입니다. 이 작업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복음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요즘 시장이 어려워 문 닫는 공방도 많지만, 저는 이 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오래도록 감당하고 싶습니다.”

글·사진=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