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에 격분한 DJ “단장의 심정으로 일기 쓴다”

입력 2025-07-23 01:12
미국 방문 중 1971년 2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 한길사 제공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당 활동 중단, 국회 해산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헌법 효력은 정지됐고, 비상국무회의를 거쳐 유신헌법이 제정됐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며 “지금 본국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놀라고 분노하고 상심하고 있을까”라고 썼다.


22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는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김 전 대통령이 자필로 남긴 일기 223편을 엮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 단 한번도 일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부인 이희호 여사가 2019년 별세한 뒤,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동교동 자택에서 여섯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대부분 한자로 쓰인 일기에는 고어와 일본식 한자 표현이 많아 정확한 판독을 위해 여러 전문가가 힘을 보탰다.

책에는 죽음을 각오한 결기로 삶과 운명에 맞섰던 한 인간의 치열한 모습이 담겼다. 망명을 택한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을 오가며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적었다.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인의 고뇌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본국에서 고생하는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1973년 1월 19일)고 적기도 했다.

이날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홍걸 이사장은 “잘못하면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수도 있는데 운 좋게 발견해 책으로 나왔다.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 묻히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박명림 김대중도서관 관장은 “유신 체제에서 겪은 개인의 고통과 한국 민주주의 쟁취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