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에 사는 중2 민주(가명)는 학교 수업에 흥미가 없다. 수학과 영어, 과학 같은 주요 과목일수록 지루하다. 수업은 딱 평균 학생에게 맞춰 진행된다. 민주에겐 수업이 너무 쉬워 딴 생각으로 시간을 보낸다. 민주는 “학교는 그냥 머무는 곳, 진짜 공부는 학원에서”라고 말했다.
민주가 다니는 학원들에는 계급이 있다. 최상단에 의대반이 있고 스카이반, 인(in)서울반 순이다. 대학 서열을 그대로 옮겨 왔다. 다른 대형 학원들도 비슷하다. 수준별 학급 편성은 기본이고, 정기 시험 뒤 학급을 이동한다. 학부모에겐 학생 성취 수준을 하루, 일주일, 월 단위로 피드백한다.
공부와 인성, 사교육이 다 해준다
공교육은 사교육에 완패하고 있다. 통계가 잘 보여준다. 22일 교육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초·중·고교 학부모가 사교육비로 지난해 지출한 총액은 29조2000억원이었다. 전년 대비 2조1000억원(7.7%) 늘어났다. 학생 수는 이 기간 521만명에서 513만명으로 8만명 감소했다.
사교육비 총액은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학생은 줄어드는데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다. 사교육 참여율과 참여 시간, 학생 1인당 사교육비 등 모든 지표가 모든 학년에서 악화일로다. 교육부는 사교육비 발표 때마다 사과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사교육 전성시대는 공교육이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해주지 못하는 탓이 크다. 사교육에 가장 밀리는 지점은 수준별, 맞춤형 학습이다. 교사는 임용고시를 통과한 우수 인재지만 손발이 묶여 있다. 학교 교실은 기초학력 미달 학생부터 선행학습으로 한참 앞서 가는 아이들이 공존한다. 교사는 ‘평균’ 수준에 맞출 수밖에 없다. 기초학력 부진 학생에겐 너무 어렵고, 공부 잘하는 학생에겐 무의미한 시간이 된다. 또 교사가 뛰어난 아이들을 별도로 가르치면 ‘차별’, 뒤 떨어지는 아이들을 남겨 가르치면 ‘학대’가 되기 십상이다.
대학 입시도 주도권이 사교육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기숙학원은 월 400만원 수준인데도 장사진을 이룬다. 입시 컨설턴트들은 웬만한 변호사보다 비싼 상담료를 받는다. 수능 ‘킬러문항’ 생산 능력 하나로 재벌급으로 성장한 업체도 있다. 사교육에서 돈 받고 수능 모의문항 제작 하청을 하던 고교 교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된 일도 있었다.
공교육의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 교육 당국은 이렇게 해명한다. “학교는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닌 전인교육을 실현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인성 및 예체능 분야 역시 사교육에 잠식되고 있다. 초등 1~4학년 학부모들은 예·체능 분야에 사교육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다. 대전의 한 초5 학부모는 “학교 체육시간이 별로 없어 2학년 때 태권도를 보냈는데, 어른들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놀랐다. 친구를 배려하는 모습도 좋아 축구학원도 계속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공교육 개혁은 줄줄이 좌초
공교육도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가장 최근 시도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였다. 현재 AI 교과서는 교과서 지위를 잃고 참고자료로 격하되기 직전이다. AI 교과서는 단순히 AI와 디지털 기기를 학생 손에 쥐어주는 게 아니다. AI가 단순 지식을 전달하고 학습 수준을 측정해주면 교사가 개별 학생을 코칭하는 수업 혁신 정책이다. 학교가 학원처럼 우열반을 운영할 수 없으니 학급 안에서 AI를 활용해 수준별 수업을 시도해본 것이다.
하지만 ‘빌드업’ 없이 급히 추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교사와 학교가 수업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하고 이런 수업에 익숙한 교사들이 많아져야 가능한 혁신이다. 현장 교사들은 “수준이 천차만별인 20~30명이 있는 교실에선 어렵다. 15명도 쉽지 않고 20명 넘으면 아예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도 “핵심은 AI가 아닌 교사”라고 강조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교원 정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반면, 사교육은 빠르게 AI의 장점을 흡수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보습 학원을 중심으로 소수 학생을 그루핑해 가르치는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AI가 주는 문항을 빨리 풀고 성취 수준을 달성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집에 가는 방식이다.
공교육은 비슷한 시도로 1교실 2교사제가 있었다. 교사 한 명이 수업을 하고 보조 교사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을 개별 지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한 수업에 교사 두 명이 공존하는 것에 현장의 부정적인 반응이 많아 무산됐다.
고교학점제도도 핵심은 맞춤형 수업이다. 진로와 적성이 비슷한 학생끼리 모아 수업하면 몰입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 부담이 여전한 상태에서 도입되다보니 학생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양해진 수업을 교사 수가 따라가지 못해 한 교사가 여러 과목을 담당해 수업의 질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퇴임 교장은 “사교육의 최대 강점은 순발력”이라며 “교육 정책은 정권 바뀔 때마다 바뀐다. 제도 과도기엔 결국 학생은 사교육으로 가야 하는데, 이 역시 사교육의 승리 공식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