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풍요 속 빈곤’ 앞에 선 사역자 “다시 걷기 위해 머뭅니다”

입력 2025-07-22 03:07
박보경 장로회신학대 교수가 최근 경기도 양평 아둘람의 집 독대의 공간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축도하고 있다. 양평=신석현 포토그래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 산길을 따라가면 ‘아둘람의 집’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기자가 찾은 지난 13일엔 전날 내린 비로 안개가 깔려 있었다. 건물 가까이 가자 안개 사이로 목조주택 지붕이 드러났다.

주차장 옆 계단 아래엔 ‘독대의 공간’이 있다. 누구나 혼자 들어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온 빛이 벽을 타고 번진다. 안내문엔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곳’이라 적혀 있다.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단정한 남색 셔츠 차림에 흔들림 없이 맞잡은 손, 모습 그 자체가 독대의 표본 같았다. 2년 전 이곳을 연 박보경 장로회신학대 선교학 교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주모’라 부른다. 주모라는 호칭에는 여정 중에 잠시 머물다 가는 이들을 밥과 대화로 맞아주는 사람이란 뜻이 담겼다.

독대 중인 박 교수를 뒤로하고 이 집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환대의 계단’이라 불리는 이 길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이가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계단 위로 텃밭이 보인다. 흙냄새가 묻은 풀 위로 바람이 스쳤다.

텃밭 옆 좁은 길목을 지나던 김령(52) 선교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해외에서 신학을 하고 돌아와 교회 여러 곳을 거쳤지만 사역이 끝날 때마다 공허함을 느꼈다”고 했다. “작은 교회일수록 사역자 한 사람이 다 떠안아요. 항상 은혜를 말하지만 정작 내 안은 바닥일 때가 많았어요.”

아둘람의 집 환대의 공간에서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 양평=신석현 포토그래퍼

김 선교사는 지난해 처음 아둘람의 집에 왔다고 했다. 교회에서 겪지 못했던 회복을 여기서 처음 경험했고 지금은 다시 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예배 시작합니다.” 김 선교사가 낮은 목소리를 권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계단을 내려가 독대의 공간으로 모였다. 각자의 독대에서 공동체의 공간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선 처음 온 이도, 여러 번 다녀간 이도 예배 전 짧게 자신을 소개한다. 이날은 군 복무 중인 장병도 있었다. 아들을 데려온 태국 선교사도 있었다. 유주영(40) 전도사가 기타를 연주하며 찬양을 인도했다. 낮은 기타 소리 위로 참석자들이 천천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기도가 이어졌다.

“…폭염 속에 타들어 가는 땅과 숨진 노동자들, 신음하는 작은 생명들, 우리의 탐욕으로 상처 입은 이 땅을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소서….”

설교는 없다. 대신 누군가의 삶의 고백이 이어진다. 이날은 장로회신학대 신대원생 오정묵(45) 전도사가 성경 구절과 자신이 살아낸 이야기를 공유했다. 예배가 끝난 뒤 사람들은 환대의 계단을 따라 다시 거실로 향했다. 따뜻한 국과 각자 가져온 음식을 상에 올라왔다. 밥그릇을 비울 즈음이면 한두 사람이 삶의 고백을 꺼낸다. 몸의 병, 가정사, 사역의 고갈. 다른 자리였다면 쉽게 꺼내지 못했을 이야기다. 강지연(44) 목사는 갑상선암이 림프종으로 전이돼 다시 수술을 앞두고 있다. 강 목사는 “오래 사역한 교회에서도 쉽게 꺼내지 못한 얘기도 여기선 담담히 나눌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아둘람의 집 독대의 공간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양평=신석현 포토그래퍼

아둘람의 집은 성경 속 다윗이 숨었던 ‘아둘람 굴’을 모델로 세워졌다. 환난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의지하던 굴처럼 이곳은 지친 사역자와 신학자, 신학생이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공간이다. 교회 안에서 늘 은혜를 전해야 하지만 정작 가장 먼저 은혜가 바닥나기 쉬운 이들이다. 참석자들은 이를 ‘은혜의 풍요 속 빈곤’이라고 표현했다.

아둘람의 집에는 몸의 건강 문제를 겪는 사역자도 많이 찾는다. 찬양인도자인 유 전도사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뇌종양 진단까지 받고 사역을 내려놓은 뒤 방황하다 지난 1월 이곳을 찾은 그는 지난 4월 수술을 받았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낯설고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꺼내게 됐다. 그러면서 몸의 치유와 함께 무너졌던 마음도 회복하고 있다고 했다.

“교회에선 늘 풍요로워 보이길 기대받지만 그걸 다 쏟아낸 뒤 돌아갈 곳이 없는 사역자도 많아요.”

유 전도사는 아둘람의 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말씀을 나누고 필사 같은 작은 숙제를 이어가며 다시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역에 대한 의지도 다시 불태우고 있다. “여기서 받은 사랑을 다시 사람들에게 흘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박 교수는 이런 과정을 ‘엘리야 인큐베이팅’이라고 부른다. 쓰러져 죽고 싶다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기다림과 먹이심으로 다시 일어났듯 아둘람의 집도 지친 사역자들이 잠시 머물며 다시 서도록 돕는다.

머무는 것은 길어야 1년 남짓. 그리고 다시 흘러간다. 사람들은 늘 바뀌지만, 숫자는 20명 안팎으로 유지된다. 박 교수는 “이곳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회복된 이들이 다시 돌아가 누군가에게 또 다른 쉼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양평=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