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어느 날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충남 금산군 금산읍에 나가서 처음 가족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는지 형사들과 무서운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몸을 숨기셨다.
엄마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부엌에서 흉기를 들고 와서 “셋이 같이 죽자”고 한 일도 있다. 그냥 잘못했다고 빌며 무슨 용기가 났는지 엄마 손에서 흉기를 뺏어 동생 손을 잡고 도망쳤다. 어렸지만 가족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다. 엄마를 꼭 살려달라고. 우리 남매를 지켜달라고.
가끔 마을 사람들은 엄마에게 “애들은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주고 새롭게 살아”라는 소리를 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와 동생만 남겨놓고 나갈까 봐 밤마다 엄마를 살폈다. 한 번은 자다 보니 옆에 엄마가 없었다. “엄마”하고 목이 터지게 부르며 울면서 동생과 마을까지 내려왔다.
엄마는 과수원에 일이 많아지자 일할 사람을 찾아 마을에 와 있었다. 그때 엄마를 만난 안도감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과수원이 마을에서 떨어진 산속에 있었기에 동생과 나는 공동묘지가 있는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마을과 멀어서 전기가 없었다. 여름이면 벌레와 무서운 생물이 많았다. 찬양을 부르면서 산을 넘었다. 칠흑 같은 밤이어도, 무서운 사람들을 만나도, 공동묘지 산을 넘어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고 믿으니까 무섭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는데 무엇이 무섭고 두려우랴. 담대함을 주셨다.
그즈음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내가 길도 나지 않은 캄캄하고 험한 산속을 계속 오르고 있다. 힘겹게 오르고 올라 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의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내게 “나중에 나의 신부가 돼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이 너무나 설레고 벅차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꿈을 꾼 것인지 실제 일이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산속을 헤매면서 똑같은 산을 찾았고 소년을 찾았다. 나는 술람미 과수원을 떠나 대전 도시로 나올 때까지 계속 찾았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는 엄마 몰래 과수원을 파셨고 세 식구는 더 이상 술람미에서 살 수가 없게 됐다. 우리 남매는 대전에 있는 29.7㎡(약 9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얻어 살았다. 엄마는 금산에서 인삼을 사서 부산 서울에서 파는 보부상을 시작하셨다. 엄마는 가끔 오셨다.
우리 남매가 부모도 없이 살았는데 어떻게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기를 작정하셨는지 내 주위는 믿는 친구들, 이웃들로 가득했고 초라한 남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엄마가 들어놓은 보험이 있었는데 당시는 보험 아주머니가 직접 수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만 오셔도 되는데 아주머니는 긴 세월 동안 매주 금요일 퇴근길에 맛있는 빵을 들고 오셔서 손을 잡고 한참 동안 기도를 해주셨다. 빵을 기다렸던 그때가 주님이 외로운 남매에게 오셔서 친구가 되어준 시간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생각해 보니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하나님은 나를 그의 초막 속에 지켜주셨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숨겨 주셨다. 그저 동생을 보살피면서 착실하게 살고픈 마음에 주일이 되면 동생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빛 아래에 있었던 것이었다.(사 43:2)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