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율 관세에 신음하는 세계 각국이 국제 교역에서 ‘글로벌 신동맹’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상호·품목 관세 폭격에 대미 협상 활로가 보이지 않자 같은 처지에 놓인 국가 간의 합종연횡 흐름이 거세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기존 미국·서방 중심의 세계 무역 질서가 변곡점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도 세계 경제 질서 전환 속에 ‘제3의 길’ 모색이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이어진다.
글로벌 교역 시스템 재편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초거대 단일시장을 구축한 유럽연합(EU)이다. 미국의 우방국과 비(非)우방국을 넘나들며 공동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21일 외신 등에 따르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호주 캐나다 일본 등이 참여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EU 간의 구조적 협력을 제안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13일엔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과도 만나 무역·투자 장벽 등을 낮추는 포괄적 경제연계협정(CEPA)을 맺기로 합의했다. 2016년 협상 시작 이후 9년 만이다. 이들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와 같은 파트너들은 서로 더 가까워져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35% 상호관세 서한을 받아든 캐나다도 대미 의존도 낮추기에 골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인 지난 1월 에콰도르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캐나다는 최근 브라질 등이 속한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MERCOSUR)과 무역 협정을 위한 물밑 작업에 돌입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며 ‘50% 관세 폭탄’을 맞은 브라질도 인도와의 교역 규모를 기존 120억 달러(약 16조7000억원)에서 200억 달러(약 27조8000억원)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미국과 접경국인 멕시코와도 교역 규모를 대폭 늘리기로 했다.
국가별로 20~40% 고율 관세에 직면한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각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인 말레이시아는 지난달 23일 스위스 노르웨이 등이 참여한 유럽자유무역연합체(EFTA)와 경제동반자협정(EPA)을 맺었다. EPA는 관세 철폐 등 시장 개방 성격을 지닌 FTA에 상호 호혜적 협력 요소까지 더해진 협정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아시아 국가들이 기존 수출 시장인 미국을 대체할 새 시장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무역 합의에 도달한 국가들도 ‘교역망 다각화’는 마찬가지다. 지난 5월 미국과 가장 먼저 무역 협정을 체결한 영국은 최근 3년 협상 끝에 인도와 FTA 협정문에 서명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영국은 인도산 섬유제품과 전기차 등의 관세 문턱을 낮추고, 인도는 영국산 위스키와 자동차, 식품 등에 문호를 연다. 블룸버그통신은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최대 무역 협정을, 인도는 유럽과 첫 FTA를 맺게 됐다”고 보도했다. 영국 베트남에 이어 지난 15일 세 번째로 미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인도네시아도 EU 등과 손을 잡고 있다.
주요국의 경제 동맹 확산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도생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주요 교역국들이 유화책부터 보복 대응까지 다양한 전략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상처만 입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미국과 7차례 협상을 벌인 일본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상호관세율이 기존 24%에서 25%로 되레 높아지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이에 일본은 23일 일본 도쿄에서 EU와 2년 만에 정상회담을 하고 안보·경제 등과 관련한 ‘경쟁력 강화 동맹’을 출범하기로 했다. 미국의 관세 압박에 맞설 ‘플랜B’ 확보에 나선 것이다.
한국 역시 대미 협상과 주요국 특사단 파견을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펼치고 있다. 최근 영국 인도 등을 방문한 대통령 특사단은 22일 캐나다 말레이시아 등과도 경제·안보 분야 등의 실질적 협력 강화 방안을 협의한다는 계획이다. EU 등이 미국을 대체하는 시장으로 떠오르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대미 자동차 수출액이 전년 대비 16.0% 줄었지만, 전체 자동차 수출액은 2.3% 늘며 2개월 만에 반등했다. 미국의 25% 자동차 관세 부과에도 EU(32.6%)·아시아(35.6%) 등 대체 시장 수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영향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격이 기존 미국 중심의 통상 질서를 재편하는 중장기적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성준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글로벌 경제 질서 전환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미국 관세 정책으로 EU, 일본, 한국 등을 중심으로 ‘규칙에 기반을 둔 무역 질서’를 재건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한국도) 역내 경제 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수출 시장을 더욱 다변화하고 안정적인 대외 경제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