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고정희 (2) 외갓집 더부살이로 눈칫밥… ‘예수의 옷’ 입혀주신 할머니

입력 2025-07-22 03:05
고정희 선교사 모친(왼쪽)과 고 선교사의 외할머니가 1971년 충북 영동의 외가 마루에서 기념촬영을 한 모습. 고 선교사 제공

나는 1972년 9월 9일 충남 금산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남동생을 업고 나를 놓칠세라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 헤매는 모습이. 얼마를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외갓집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버렸다. 엄마는 아버지를 찾으러 다닌 것이었다. 중매로 만난 엄마와 아버지는 결혼 시작 전부터 망가졌다고 했다. 엄마는 말하곤 했다. 너희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나는 가족과 헤어져 외가 식구와 살았다. 외할머니는 아프셔서 늘 방에 누워 계셨고 한 번 기침하시면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가 무서웠던 기억이다. 외할아버지는 몸집과 목소리가 크고 무서웠다. 외갓집엔 식구가 많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나 한 명 더 얹혀 있는 것이 미안했다. 밥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궂은일을 찾아서 했다.

당시 시골은 수도 시설이 거의 없었기에 나는 시간만 나면 마을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왔다. 추운 겨울 강가에 가서 빨래하면 작은 손으로 꽉 짜지 못했기에 빨래가 얼었다. 펴지지 않은 빨래를 줄에 너느라 안간힘을 썼다. 밥할 시간이 되면 부엌으로 가서 외숙모를 도왔다. 누가 하라고 한 것은 아닌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마와 떨어지고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몸이 자주 아팠지만 아픈 것보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던 게 더 힘들었다. 난 아프신 할머니와 함께 잤다. 나중에 엄마는 “어린 딸을 아픈 할머니와 함께 재웠다”며 서운해하셨다.

할머니는 폐렴에 간경화를 앓고 계셨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아프신 것인지 잘 몰랐다. 할머니 방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늘 찬송가를 들으셨다. 테이프가 다 돌아가면 나는 반대로 돌려서 다시 틀어드렸다. 외할머니는 나를 예뻐해 주셨다. 말하기도 힘드셨는데 애를 쓰시며 기도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는 외갓집에서 홀로 예수님을 믿고 계셨다. 아픈 할머니는 어린 내게 교회에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어린 내가 혼자 가기에는 먼 거리였다. 처음 예배를 드리고 온 날에 잘했다고 기뻐하시던 할머니가 서럽게도 그리울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천국에 가시는 밤에도 나는 테이프를 돌려가며 찬송가를 함께 들었다. 나는 아침까지 할머니 옆에서 잤다. 할머니는 그렇게 예수님을 내게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나는 어쩌다 태어난 보잘것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너는 나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예수의 옷을 입혀주셨다.

어느 날 외갓집에 온 엄마는 너무 마르고 핏기없는 어린 딸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엄마, 동생과 충남 금산에서 살게 됐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주신 과수원이 있었는데 엄마는 혼자서라도 과수원을 하면서 남매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과수원은 산속에 있었고 매일 뛰어다니며 일이 많았다. 엄마랑 동생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무엇이든 맛있고 행복했다. 나는 까무잡잡하게 건강해졌다. 신기하게도 과수원이 있던 산 이름이 술람미다. 사람들은 나를 말할 때 술람미 과수원집 딸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5)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