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은 너무 오랫동안 갈취당해 왔다. 이제는 우리가 갈취할 차례”라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선언대로 각국에 무차별 관세 통보 서한을 보내며 무역전쟁의 판을 키우고 있다. 트럼프식 ‘갈취 통치’는 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내 대기업과 언론사, 대학교 등 여러 분야에서 소송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갈취가 이뤄지고 있다.
대통령 권한 활용 반복적 사익 축적
미국 시사지 디애틀랜틱은 지난 4일(현지시간) ‘마피아식 대통령제에 온 걸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트럼프가 소송을 통해 언론을 협박하고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대기업 파라마운트는 트럼프와의 소송 합의금으로 1600만 달러(220억원)를 냈다. 앞서 트럼프는 지난해 11월 파라마운트 자회사인 CBS방송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인터뷰를 민주당에 유리하게 편집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디애틀랜틱은 “이번 일은 파라마운트가 먼저 합의금을 제안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트럼프가 돈을 갈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합의금은 트럼프 퇴임 이후 만들어질 대통령 도서관에 기부됐다.
디애틀랜틱은 “대통령 도서관이라는 간판 아래 돈이 세탁됐다고 해서 ‘갈취’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며 “이처럼 조직적인 공갈 협박 행위는 트럼프 본인과 가족, 정치적 동맹의 사익을 위해 반복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ABC뉴스도 합의금으로 트럼프와의 소송을 끝냈다. ABC뉴스는 지난해 3월 방송에서 앵커 조지 스테퍼노펄러스가 “트럼프에게 강간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가 명예훼손으로 제소됐다. 합의금 1500만 달러(207억원)는 대통령 기부금으로 쓰인다.
트럼프는 소송을 앞세워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 미군의 이란 핵시설 폭격 이후 CNN과 뉴욕타임스가 이란 핵프로그램 핵심 요소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고 보도하자 트럼프 측은 기사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철회하지 않을 경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밥 톰슨 시큐러스대 언론학 교수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파라마운트 사건을 언급하며 “한 세대 전이라면 언론 역사상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파라마운트가 매각과 관련해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가운데 트럼프 측에 기부금을 건넨 건 뇌물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합의 과정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계정 정지했다가 날벼락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소셜미디어 최고경영자(CEO)들도 트럼프의 갈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메타(페이스북·인스타그램)와 구글, 트위터(옛 엑스)는 2021년 1월 미 의사당 폭동 직후 트럼프가 지지자들을 추가적으로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트럼프의 계정을 정지했다. 트럼프는 이 업체들을 상대로 “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언론·출판의 자유 침해)했다”며 소송을 냈다.
소송은 예상대로 수천만 달러의 합의금으로 마무리됐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대통령 도서관 기금 명목으로 2500만 달러(345억원)를 기부했다. 트위터의 경우 계정 중지 당시에는 잭 도시가 CEO였는데, 트위터를 인수해 엑스로 이름을 바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1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내면서 소송을 끝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아직 소송을 진행 중이다. 트럼프와 피차이 양측 변호인단은 지난 5월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 소송과 관련해 아직 논의 중이라는 내용의 서류를 제출했다. 양측은 오는 9월 2일까지 협상 결과를 제출할 예정이다. 디애틀랜틱은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대통령의 권한 활용 방식이 법적 논리보다 얼마나 더 강력한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실제 2022년 트럼프는 엑스와의 소송에서 졌다. 항소 결과를 기다리던 중 머스크가 합의하며 서둘러 종결지은 것이다. 디애틀랜틱은 “피차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며 “법적으로 승산은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보복을 감수하고 소송을 이어갈지, 아니면 대통령 도서관에 거액을 기부할지를 정해야 한다”고 짚었다.
대학 장학금까지 갈취 타깃
미국 대학들의 장학금도 갈취 대상이 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중시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정책을 펴면서 대학이나 기업, 자선단체들이 인종 등에 기반한 장학금 제도를 개편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최근 미시간대는 소수인종 학생을 지원하던 장학금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미 법무부는 지난 4월 노스웨스턴대와 시카고대 등 6개 대학이 소수인종 대학원생을 위한 장학 프로그램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미 교육부가 지난 2월 대학들에 DEI 정책과 관련해 연방 지원금이 끊길 수도 있다고 통보한 데 따른 조치다. 미국 기업과 자선단체들도 수년간 소수인종 학생들을 지원해오던 수백만 달러 규모의 장학금 제도를 재조정하고 있다.
미국 전국장학금제공자협회(NSPA) 재키 브라이트 회장은 “소송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많은 장학금 제공 기관들이 제도를 재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NSPA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인종·성별을 기준으로 하는 장학금은 5600만 달러 규모다. 이는 2023년 3월보다 25% 감소한 수치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