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올 줄 몰랐지? ‘뽑파민’에 빠진 2030

입력 2025-07-21 02:04 수정 2025-07-21 02:04
이미지= 챗GPT

지난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제전자센터. 한때 용산 전자랜드·구로 테크노마트와 함께 ‘서울 3대 디지털상가’로 불렸던 이곳에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다. 이곳은 이제 2030 세대 사이에서 ‘가챠 성지’로 통한다. 캡슐 토이 자동판매기 수천대가 빼곡히 자리 잡으며 인기 몰이 중이다.

비가 내리던 평일 오후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게임기 매장을 운영해온 A씨(50)는 “1년 전쯤 가챠 기계를 들였는데, 지금은 센터 안에만 4000대가 있다”며 “온라인 중심으로 게임시장이 바뀌면서 어려워졌던 매장에 다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른 매장 운영자 문성태(40)씨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죽은 상가’ 같았는데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며 “젊은 여성분들이 가장 많지만 커플과 가족단위로도 많이 온다. 여자친구나 아내를 따라 온 남성분들이 게임기 매장을 둘러보게 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무작위 뽑기 ‘가챠’의 인기가 커지고 있다. ‘가챠 성지’로 통하는 서울 서초구 국제전자센터에서 방문객들이 가챠 기계를 구경하며 지나가는 모습. 신주은 기자

가챠는 일본어 ‘가챠가챠’에서 유래한 단어로, 뽑기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찰칵찰칵’ 소리를 의미한다. 어떤 상품이 나올지 알 수 없는 무작위성이 긴장감과 기대감을 자극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과 뽑았을 때의 짜릿한 쾌감이 중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함이 주는 즐거움은 MZ세대의 취향과 맞닿으며 하나의 놀이이자 소비 문화로 자리 잡았다.

사실 ‘가챠’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는 아니다. 한때 문방구 앞에 놓인 ‘캡슐 뽑기’ 기계는 어린이들 사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최근엔 주 소비층이 달라졌다. 2030 여성들이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가운데 가격대는 4000~5000원대가 기본, 만원을 넘는 제품도 있다. 이전엔 학교 앞 문방구 한켠, 쇼핑몰의 한 코너 정도를 차지했다면 최근엔 가챠 기계가 가득 들어찬 ‘가챠숍’이 대세다. 제품의 퀄리티도 한층 높아졌다. 산리오, 포켓몬, 짱구같이 익숙한 캐릭터부터 새롭게 유행하는 캐릭터들까지 구성도 다양하다.

이날 만난 박지현(33)씨는 “가는 곳에 가챠 기계가 있으면 꼭 들른다”며 “어렸을 때 봤던 ‘카드캡터 체리’ 같은 추억의 캐릭터 상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친구와 함께 국제전자센터를 찾은 김모(25)씨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가챠를 한다”며 “한 번에 2만원 정도 쓰는데, 뭐가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원하는 걸 뽑았을 때의 쾌감이 중독적”이라며 웃었다.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 ‘가챠 파크’에서 쇼핑객들이 가챠를 즐기는 모습. HDC아이파크몰 제공

이같은 랜덤 소비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핵심 전략으로도 떠오르고 있다. 온라인 거래가 일상이 된 시대에 ‘가챠’가 소비자 발길을 이끄는 확실한 ‘미끼상품’이 되고 있는 셈이다. 서울 용산구 HDC아이파크몰은 지난해 9월 150여개의 가챠 머신이 설치된 ‘가챠파크’를 오픈했는데, 첫달에만 약 4만명이 방문해 2억원 가량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에 지난해 말 50여개의 머신을 추가로 설치해 가챠 존을 확대했다. 편의점 업계도 동참 중이다. GS25는 지난 5월 일부 매장에 일본에서 시작된 ‘꽝 없는 캐릭터 뽑기’ 이치방쿠지 키오스크를 설치했다. CU도 지난 1월 10~20대 여성이 즐겨 찾는 상권을 중심으로 가챠 머신을 시범 도입했다. 홍대와 강남역 등 주요 상권과 AK플라자·스타필드 등 대형 쇼핑몰에서도 ‘가챠숍’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가챠’로 대표되는 무작위 소비 구조는 K팝 앨범, 패션·뷰티 등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며 하나의 마케팅 전략으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지난 2월 SM엔터테인먼트는 SM타운의 앨범을 가챠 캡슐 형태로 출시해, 팬들이 실제로 가챠 머신을 돌려 구매할 수 있게 했다. 스마트 앨범 커버와 포토카드를 랜덤으로 구성해 ‘뽑는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온라인 가챠 마케팅도 성행 중이다. 같은 시기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는 인기 상품을 5000원대에 무작위로 만나볼 수 있도록 한 ‘가챠형 뷰티 상품’을 출시했다. ‘에스쁘아’의 가챠 상품은 에이블리 전 카테고리 랭킹 1위를 차지했고, 다른 브랜드의 가챠 상품도 랭킹 TOP 10에 이름을 올리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벤트 기간 동안 인기 색조 브랜드 ‘투에이엔(2aN)’의 에이블리 내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9.7배 가량 증가하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도 비슷한 흐름이다. 중국 완구기업 팝마트는 자사 캐릭터 ‘라부부’를 활용한 블라인드 박스(랜덤박스)를 앞세워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블라인드 박스 제품은 박스를 개봉하기 전까지 어떤 제품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고, 별도로 구매할 수도 없는 희소성이 특징이다. ‘중국판 다이소’라고 불리는 미니소도 최근 서울 강남점 개점을 맞아 디즈니 캐릭터 ‘스티치’를 활용한 블라인드 박스를 출시했는데, SNS를 통해 ‘한정 수량’, ‘조기 품절 가능성’ 등의 문구로 소비자 심리를 자극해 빠른 속도로 완판됐다.

그러나 이같은 랜덤형 상품이 과도한 소비와 중독적 구매 행동을 유도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2023년 중국 정부는 구매 중독에 대한 우려로 8세 미만 어린이에게 블라인드 박스 판매를 금지하고, 8세 이상은 보호자 동의를 받도록 하는 규제를 시행했다. 지난달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여름 방학을 앞두고 10대 청소년들의 랜덤 박스 소비가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며 “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국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띠부띠부씰’로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빵은 일부 소비자들이 스티커만 수집하고 빵은 버리면서 식품 낭비 논란이 일었다. 아이돌 앨범도 마찬가지다. 멤버와 앨범 버전별로 수십종에 이르는 포토카드가 랜덤으로 들어가 있어, 원하는 카드를 얻고 세트를 완성하기 위해 같은 앨범을 수십장씩 구매하는 ‘과잉 소비’가 반복되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작은 ‘로또’같은 가챠가 인기 있는 이유는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현실에서 작은 성취감과 행운을 느끼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요즘 소비자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을 넘어, 소비 행위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펀슈머(Fun+Consumer)’ 경향이 강하다”며 “예상치 못한 결과에서 오는 ‘대박 경험’이 반복 구매를 유도한다”고 말했다. 다만 “작은 성공을 경험했을 때 ‘더 큰 당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만두기 어려운 구조가 생기기 쉽다”며 “스스로 ‘만원까지만’ 같은 규칙을 정해서 지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주은 기자 ju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