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혁 기자의 ‘예며들다’] 겨자씨만 한 숨 쉴 구멍이라도

입력 2025-07-19 03:06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3’ 보고서에 따르면 만19세 이상 국민 10명 중 3명 이상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고립됐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한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긴급생계비 받던 60대 엄마·30대 아들 숨진 지 20일 만에 발견’ ‘동탄 아파트 주차장 차량서 유서에 생활고 한탄한 일가족 4명 숨진 채 발견’ ‘소리 없는 죽음… 고독사, 마지막까지 외로운 사람들’

최근 연일 뉴스에 오르내린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대전 한 아파트에서는 생활고를 겪던 60대 어머니와 30대 아들이 숨진 지 20여일 만에 발견됐고, 경기도 화성에서는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차량에서 40대 부부와 10대 자녀 2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제적 어려움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고독사 기사도 눈에 띈다. 이전까진 대다수가 홀몸 노인이었는데, 점점 고립·은둔 청년도 늘어난다고 한다. 가족 외엔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없어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받지 못하거나 제한된 공간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사회활동을 단절한 청년들이 해마다 증가한 결과다. 전국적으로 고립·은둔 청년만 52만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니 가벼이 볼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때론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 앞에서 신의 존재를 찾는다. 절대자의 존재 의미에 더해 교회의 역할을 묻는다. 하지만 꼭 대참사에서만 그런 질문이 필요할까. 앞선 일상 속 우리네 이웃들의 안타까운 사건을 마주할 때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질문해야 할 법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교회의 주요 사명은 복음 전파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사역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교회의 존재 이유인 영혼 구원과 복음 전파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없다. 문제는 영혼 구원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 놓고 별개의 사역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교회 바로 옆집에서는 사람이 외로이 죽어가는데 교회는 이를 모른 채 홀로 부흥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아닐 것이다. 성경은 결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한 마리 정도는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

교회가 일일이 나서서 챙기기엔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 문제들을 방관한다면 하나님이 교회에 세상을 맡기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를 사회 구조나 정부의 역할로 국한해 세상에 떠넘긴다면 과연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역으로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까.

물론 소외된 이웃을 섬기려는 교회의 노력을 두고 결국은 교회에 다니라고, 예수 믿게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비난이 대수인가. 사회와 사람들과 단절돼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내미는 손을 지금 당장이라도 붙잡는 데 온 힘을 써도 모자랄 때다.

또 과연 교회 공동체는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을 제대로 품고 있느냐는 질문도 해본다. 그들을 공동체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먼저 손을 내밀기보다는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잡아주겠지 하며 애써 외면하는 건 아닌가 반성해 본다.

한 조사에서 교회 이탈을 고민한 청년 중 절반이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교인이 한 명도 없다’고 답했다는 지난 16일자 국민일보 보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필요로 하는 건 거창한 도움의 손길이나 적극적인 행동이 아닐 것이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라고 물으며 곁으로 다가가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일, 다만 작은 관심에서부터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겨자씨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했던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겨자씨만 한 숨 쉴 구멍 아닐까.

이 글을 쓰던 날, 인천의 한 해수욕장 인근 공터에 세워진 차 안에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또 한 가정이 쓰러졌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