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관세협상 추가 시한이 다가오면서 통상 부문과 정부 부처 사이 혼선이 돌출하고 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30개월령 이상 소고기를 비롯한 농축산물 시장 개방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농축수산업자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여 본부장의 발언은 정부 부처와 사전 협의 없이 나온 것으로 파악돼 개방 여론전인지, 대미 협상 전략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과 ‘홀 패키지’ 협상을 진행 중인 대통령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16일 여 본부장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의 정해진 입장은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각 정부 부처에선 아직 방침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 본부장의 돌발 발언으로 협상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기류가 강하다. 최근 농민단체 등을 잇달아 만나며 수습에 나섰던 김민석 국무총리도 여 본부장 발언을 듣고 역정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협상은 여 본부장이 단독으로 시장 개방을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관세·비관세장벽은 물론 안보 상황까지 종합적으로 미국과 주고받아 정상 간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통상 부문이 나 홀로 나서기 시작하면 오히려 협상 영역만 더 줄어들게 된다. 한 정부 고위 당국자는 “상식적으로 통상 책임자가 사전 조율 없이 그런 발언을 내놓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농축산 관련 부처는 시장 개방을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해당 발언이 나온 것이라 우려한다. 여론을 살펴 반발이 적은 분야를 개방하려는 의도라는 의미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산업부 주도 협상에서 농축산업은 항상 후순위였다”며 “이번에도 농축산업을 ‘버리는 카드’로 보고 사전 여론을 살피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광우병 파동’ 이후 소고기와 전략비축 산업인 쌀 부문은 민심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어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다. 미국 역시 해당 분야 개방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부정적 여론을 내부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일각에선 통상 협상에 잔뼈가 굵은 여 본부장이 일종의 기획성 발언을 내놓은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극렬한 국내 반발 여론을 미국에 보여줘 개방 압박을 회피하려는 취지라는 뜻이다. 한 외교 당국자는 “여 본부장은 통상 전문가라 해당 분야의 국내 민감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사”라고 평가했다. 황태희 연세대 교수는 “정부가 미리 내부에서 의견을 조율해 소, 쌀 등에 대한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 해당 발언을 내놓았다면 그나마 좋은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