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잊혀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한 노인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주인공은 한때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과거를 지닌 인물이지만 이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되어 일상의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연쇄살인범을 만나게 되고,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 점점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끝없이 메모하고 녹음하며 스스로를 붙잡으려 애씁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아닌 어떤 곳에서 헤맨다.”
이 묘사는 단지 알츠하이머 환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오늘을 살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영적 치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건 잘 기억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 시대의 더 큰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특히 구약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그 밤을 단지 사건으로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주시고, 무교절 절기를 지키게 하시며, 초태생을 구별해 하나님께 드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기억은 의무이자 정체성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앨런 크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이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는 ‘기억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며 그 기억에 따라 삶의 모든 영역이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은 단지 믿음(Belief)만이 아니라 삶의 행위(Behavior)와 소속(Belonging)까지도 함께 바뀌는 삶의 총체적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변질하였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의 핍박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과거에는 세례를 받기 위해 3~5년의 훈련을 거쳐야 했지만 이제는 2개월도 안 되는 형식적 교육으로 대체됩니다. 삶의 총체적 변화 없이도 교회에 속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억이 제도화되면 신앙은 본질을 잃게 됩니다. 기억이 변질되면 믿음도 변질됩니다. 기억이 흐려지면 은혜도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기념하라’는 ‘아남네시스(anamnesis)’라는 헬라어의 번역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기억’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단지 정신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아남네시스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그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며 그리스도께서 그때 하셨던 일과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계신 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던 그 사건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안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재현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사건이며 단순한 회상이 아닌 참여하는 기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기억이고 예배자의 기억법입니다.
한 청년이 하루 동안 스마트폰을 꺼놓고 ‘미디어 금식’을 실천한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루 동안 SNS를 하지 않았을 뿐인데, 오히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자리를 만들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배란 바로 그 기억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정렬하고, 세상 속에서 흐려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선명히 붙잡는 시간입니다. 바쁘고 복잡한 일상 속에서도 매주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고 삶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며 내 소유의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봉헌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기념)하라” 말씀하십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아닌 예배자의 기억법. 그 기억 위에 우리의 신앙이 서 있습니다. 주님을 기억하며 구원의 은혜를 삶 속에 새기는 예배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