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대인의 안식년을 통한
빈자의 포용이 오늘날 귀감이
되는 건 예측가능 질서 때문
새 정부의 정책은 정의만을
앞세운 홍길동식 즉흥적
발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어
혈세를 넘어 국민 예금의 댐인
은행을 함부로 허물면
나라 경제 삽시간에 무너져
빈자의 포용이 오늘날 귀감이
되는 건 예측가능 질서 때문
새 정부의 정책은 정의만을
앞세운 홍길동식 즉흥적
발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어
혈세를 넘어 국민 예금의 댐인
은행을 함부로 허물면
나라 경제 삽시간에 무너져
대학교수들이 누리는 안식년 제도는 고대 유대인의 가나안 공동체가 원조다. 오늘날엔 ‘쉰다’는 의미로 국한하지만, 원래 빈자를 보듬어 부의 편중을 막아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사회안전망 성격이 강했다. 이는 출애굽기 23장에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고 일곱째 해에는 묵혀 두어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는 야훼 명령에서 엿볼 수 있다. 야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빚 탕감까지 명하신다(신명기 15장 1절). 당시 팔레스타인 농경사회는 가뭄, 전염병, 외침 등으로 땅을 잃어 빚을 진 자가 종이나 유랑민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일정 주기로 부채와 소유권을 초기화하라는 ‘사회적 리셋’을 명령하신 것이다. 안식년의 빚 탕감은 공동체 전체가 예측 가능한 질서 속에 참여하는 제도화된 재분배였던 셈이다.
물론 이 제도를 경제 여건이 다른 오늘날 100%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측 가능성과 질서’라는 원칙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그래서 새삼 안식년을 언급하는 건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채무 탕감 발언이 혹여 이 원칙을 깨고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일 대전 타운홀 미팅에서 2차 추경을 언급하며 “(은행이) 예측했던 위험을 이미 다 비용으로 산정해 이자로 받고 있는데, 못 갚는 걸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받으면 부당이득”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성경 구절을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신명기 15장 2절에 “그의 이웃과 형제를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니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하지만 야훼의 빚 탕감 명령은 안식년이라는 질서 속 사회계약이었지 금융 시스템을 깡그리 무시하고 홍길동같은 의적처럼 행동하는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원리금 상환은 대출 계약의 핵심인데 그 집행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금융 질서 무력화 선언의 우회적 표현 아닌가. 이자는 대통령 주장대로 위험 회피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기회비용이라는 시간 가치와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 추가된다. 게다가 대손충당금으로 리스크를 헷지하는 건 금융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앞장서 이자로 대출을 갈음하려는 건 금융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발상이거나 아니면 포퓰리즘의 소산 중 하나다. 나아가 그는 “정상적으로 갚는 분들도 많이 깎아줄 생각이고, 앞으로도 추가할 생각”이라는 약속도 서슴지 않는다. 이쯤 되면 정책의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송두리째 허물려는 의도로밖에는 달리 이해가 안 된다.
대통령 발언이 ‘시그널’로 작용한걸까. 금융 당국은 한술 더 떠 시중은행을 정부 쌈짓돈 창구로 삼으려 한다. 금융위원회는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가중치 하한(15%)을 올리는 대신, AI·첨단산업 대출은 위험가중치를 400%에서 100%로 대폭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부동산 담보 위주 대출을 줄이고, 대통령 공약인 ‘100조 AI 펀드’ 같은 산업으로 자금 흐름을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겉으로는 생산적 자금 배분을 유도하는 그럴듯한 방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간 정부 행태를 보면 이를 마뜩해 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과 담보인정비율(LTV) 규제가 수도 없이 바뀌며 부동산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게 불과 엊그제 일이다. 위험가중치 규제는 은행의 건전성과 직결된다. 이를 특정 산업 육성을 위해 조정한다는 발상은 은행을 ‘정책 금고’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공적 자금이 일정 수준 기여하는 경우를 가이드라인에 삽입하겠다는 것인데 이쯤 되면 시중은행이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뭐가 다른지 의문이 든다. 개발독재 시절 관치금융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그때는 형식적 자율성이라도 남겼었는데 이번엔 관치를 문서로 남기려는 뻔뻔함까지 묻어난다.
은행은 국민들이 땀 흘려 번 돈을 담아주는 저수지 같은 곳이다. 그런데 댐 수위를 함부로 조절하면 정작 홍수 때 조절 능력을 잃는 것처럼 금융 건전성 기준을 국민 설득도 없이 정부 입맛대로 손댈 경우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가 증명한다. 개발독재 시절 반복된 관치금융이 1997년 외환위기로 이어진 게 대표적 사례다. 야훼의 안식년 구상은 공동체 전체가 참여한 예측 가능한 질서였다. 이 원칙을 무시한 대통령의 한마디가 금융 질서는 물론 나라경제를 삽시간에 망가뜨릴 수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