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핏 잠이 들었다. 오랜만의 달큼한 낮잠이었다. 스르륵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푸르스름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잠결에 들리던 빗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포근했기에, 반쯤 꿈에 걸려 있는 듯한 정신으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베개에 눌린 뺨이 울퉁불퉁했고 체온은 따뜻했다. 시계를 봤지만 얼마나 잤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베란다 창가에 주저앉아 희뿌연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메마른 어제와 달리 세상이 온통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은 두툼한 솜이불처럼 하늘을 뒤덮었고, 빗줄기는 약간 잦아든 듯했다.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빗방울이 동그란 몸을 부숴 한 줄기 선으로 흘러내렸다. 길 건너편 하천은 볼품없이 드러난 바닥을 겨우 적시던 모습을 지우고 삽시간에 흙탕물로 차올라 넘실댔다. 이따금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녹진한 습기를 가르는 소리를 냈다. 물먹은 나무가 검게 빛나고 가지에 매달린 진녹색 잎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빗방울을 털어냈다. 사람도, 참새도, 길고양이도 어디론가 몸을 숨겼고, 거리는 한산했다. 세상 만물이 침묵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고요는 비 오는 날 특유의 묘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비 오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대지의 열이 식고 동식물이 해갈하는 동안, 내 게으름과 나른함을 기꺼이 수용할 만한 적절한 핑곗거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유연하게 이 상황에 기대 보기로 했다. 김치전을 바삭하게 부쳐 먹고, 실없이 웃을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보기로. 모처럼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갖는 휴식을 선물처럼 받아들였다. 적적하면서도 평온한 이 안락함에 남은 하루를 맡기는 것은 비가 그치고 나면, 세상은 또 다른 목소리로 나를 집 밖으로 불러낼 테니까. 다시 이글거리는 여름의 열기 속에서 말간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살아갈 날들을 위해. 비가 와서, 작정하고 쉬어가는 하루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