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입구 천장에서 우윳빛 직선 패턴이 빠르게 물줄기처럼 쏟아지며 관람객을 맞는다. 자세히 보면 숫자와 알파벳으로 구성된 데이터가 가느다란 띠를 이루며 기습하듯 흐른다. ‘디지털 은하수’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일본 출신의 세계적 사운드아티스트 료지 이케다(59) 개인전 ‘2025 ACC 포커스-료지 이케다’를 시작했다. 그는 ACC 개관 첫해인 2015년 융복합 창제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보인 설치 예술 작품 ‘테스트 패턴(test pattern)[no8]’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 ACC가 과학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기치로 내걸었던 ‘ACT(예술& 창작 기술) 페스티벌’에 참여해 오디오 비주얼 콘서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ACC와의 오랜 인연 덕분에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시대상을 담아낼 10주년 특별전의 주인공으로 선택됐다.
이번 전시회에선 신작 3점을 포함해 총 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디지털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신작 ‘데이터. 플럭스(data. flux)[no2]’는 인간 DNA 정보를 패턴으로 변환한 작품이다. 영상 속 정보는 쉼 없이 변하지만 이를 따라잡긴 어려운 속도에, 관람객들은 인지적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하늘의 은하수가 동화 같은 위안을 주는 것과 달리 소음 같은 전자음과 어우러져 오히려 불안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또 다른 신작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는 가로, 세로 10m의 바닥 스크린에 투사된 검은 원과 흰빛이 극명한 대비를 울리는 가운데 전자음이 관람객의 몸을 압도하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가장 스펙터클한 작품은 3개의 스크린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채운 ‘데이터-벌스(data-verse) 1/2/3’(2019∼2020)이다. 작품 제목은 데이터와 유니버스를 합친 조어다. 영상에는 빌딩과 자동차, 화산, 산불, 홍수 등 각종 영상 이미지와 심박수, 위도, 세포 등의 그래픽 이미지가 정신없이 흐른다. 미국 우주항공국(NASA),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 인간 게놈 프로젝트 등에서 수집된 관측 자료와 유전자 정보 등의 데이터를 소재 삼아 작업했다.
작가는 과학 데이터를 물감처럼 쓰면서 인간과 우주를 주제로 우리 시대의 ‘데이터 회화’를 보여준다. 데이터를 단순 정보가 아닌, 감각을 일깨우는 미학적 재료로 다뤄왔기에 ‘데이터 아티스트’로 불린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소음 같은 전자 음악은 그가 원시 상태의 소리에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종종 인간의 청각 범위 경계에 있는 주파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1990년대 순음과 백색 소음을 결합한 전자 음악을 실험했다.
개인으로 활동하지만, 독일 현대 미술가 카르스텐 니콜라이와 함께 ‘사이클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인 작가 집단 ‘덤 타입’과 협업하며 실험적인 퍼포먼스와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광주=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