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리틀턴의 다리

입력 2025-07-15 00:30

미국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차로 두 시간 반쯤 올라가면 리틀턴이란 작은 마을이 있다. 최근 아내와 나는 첫째 아들이 데려온 유기견인 우리 집 막내와 그곳에서 며칠을 보냈다. 학교가 교수진에 일상을 벗어나 묵상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기회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우리는 암모노삭강 하류의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강 상류를 따라 이어지는 리틀턴 시내를 걸었다. 마침 이날은 마을 행사가 있는 날이었는지 강 건너편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난간에 수십 개의 명패가 붙어 있었다. ‘무언가를 기념하는 다리인가 보네’라고 생각하며 걷던 중 다리 중간쯤의 한 명패가 유독 눈에 띄어 발길을 멈췄다. 부착된 지 오래지 않은 듯 청동빛이 반짝이는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 알프레드 H 시드니 병장, 23세. 1951년 5월 18일 전쟁 포로로 잡혀 1951년 7월 31일 포로로 사망. 2022년 12월 1일 유해가 집으로 돌아오다.”

찾아보니 알프레드 시드니는 이 마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다섯 형제 중 맏이였다. 1945년 리틀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지 공장에서 일하다 이듬해 미 육군 공병대로 입대했다. 독일에 배치돼 전문 교육을 받고 1949년 제대해 고향에 돌아왔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소집됐다. 한국에는 1951년 경보병으로 파병됐다.

가족이 받은 그의 마지막 편지는 1951년 5월 13일자였다. 시드니는 이 편지에서 “적진 후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5월 18일 강원도 한계리 인근에서 그는 전쟁포로로 잡힌다. 이후 북한 창성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그해 7월 31일 그곳에서 숨졌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유해 교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군이 회수한 시신 중 하나는 신원을 알 수 없어 ‘X-14144’란 표식이 붙었다. 이 유해가 무려 68년이 지난 2022년,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의 DNA 분석을 통해 시드니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유해는 2022년 12월 8일 고향 리틀턴으로 돌아와 어머니 묘 옆에 안치됐다. 이날 시드니의 조카 칼린은 유가족을 대표해 리틀턴 지역 신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고, 마음이 치유되기도 했어요. 이 모든 게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슬픔의 층위 그 아래에는 언제나 더 밝은 무언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삼촌의 귀환은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사건이자 메시지입니다. 이는 지역사회의 상실이자 나라의 상실, 군의 상실일 뿐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상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이 모두가 축복을 받고, 그만큼 더 큰 치유가 일어납니다.”

리틀턴 다리에는 한국전 참전 용사 일곱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허버트, 도널드, 조지, 릴랜드, 오즈월드, 시어도어, 그리고 시드니. 아내와 나는 그 이름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인구 6000명 남짓인 이 작은 마을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을 75년 전 자기 아들들을 머나먼 땅으로 보내줬다. 이들 중 일곱이 유해로 고향 땅에 돌아왔다. 시드니의 가족은 무려 71년이 지나서야 그를 온전히 묻을 수 있었다. 나라면 먼 나라 이웃을 위해 내 아들을 그렇게 보낼 수 있었을까.

이날 우리는 감동을 안고 다리를 건넜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쪽에 도착해보니 그곳에선 ‘프라이드(Pride)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다리를 따라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되뇌었다. 참, 세상이 많이도 변했구나.

박성현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