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광림교회 박동찬 목사는 몇 년 전 한 기독교방송에 나와 부목사 시절 30년 동안 앓고 있는 피부질환을 놓고 기도원을 찾았던 일화를 들려줬다. 건선을 앓고 있어 피부가 가렵고 긁으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불치병을 고쳐달라며 어느 날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기도원을 찾았다. 박 목사는 한 평 공간의 기도원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서 “제가 욥입니까. 바울입니까” 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다. 그렇게 깜깜한 밤에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림 하나를 보여주셨다고 한다. 한센인이 휙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저게 네 모습이면 어떻게 하겠느냐, 건선은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면서 나를 쓰고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도 찬양하겠다고 회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육체적 고통의 의미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우리는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께 매달린다. 이 병을 고쳐주신다면 주일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고, 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겠노라 다짐한다. 하나님을 상대로 조건을 내걸며 협상도 시도하고 협박도 하다가 그래도 병이 낫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출 15:26)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라는 성경 말씀이 의심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이 고통당할 때 중보기도를 하면서도 때로는 의심한다. 정말 하나님이 고쳐주실까.
복음주의 작가이자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편집장을 지낸 필립 얀시는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프랑스 과학자들이 모든 외부 자극으로부터 격리돼 살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인간이 적절히 기능을 발휘하려면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했을 때 실험 대상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심지어 환각 증세까지 경험했다.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은 고통의 신호를 두뇌에 전달해 주는 바로 그 신경 감각 기관과 통로가 또한 쾌감의 신호도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화로에 닿으면 뜨거운 고통을 느낌으로써 경계하고 파멸로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과 고난 같은 외관상 비극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도록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신앙을 강화할 수 있다고 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전립선암 투병 생활을 토대로 쓴 책 ‘병상의 은혜’에서 다음 같은 사실을 명심하라고 조언한다. “이 고난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히 지속될 치유를 이뤄내는 중이다.” 고난은 그저 극복해야 할 장애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감당한다면 그것은 더 큰 기쁨으로 가는 도약대가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가시는 교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16세기 수도원에서 일했던 로렌스 형제는 “주님은 때때로 육체의 질병을 허락하심으로써 영혼의 병을 고치려 하신다고 했다. 용기를 갖고 이 한계를 오히려 기회로 삼으라”고 권면했다(‘하나님의 임재연습 플러스’, 진 에드워드 엮음).
고난이 주는 이익
스코틀랜드 태생의 목사이자 선교사인 조지 매더슨(1842~1906)은 17세부터 시력을 잃어 스무 살에는 완전히 실명했다. 그러나 사역을 하겠다는 결심을 고수하며 신학과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약혼녀는 평생을 시각장애인과 함께할 수 없다며 끝내 파혼을 선언했다. 그의 누이가 한동안 그를 돌봐 주었지만 그녀도 결국 결혼을 하면서 할 수 없이 그를 떠나고야 말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할수록 절망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에 빠진 그에게 ‘오,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랑’(O Love That Will Not Let Me Go)이란 곡을 쓰도록 영감을 주셨다. 이 곡을 쓰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랑이여/ 내 지친 영혼이 당신의 풀밭에 편히 쉬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나의 생명을 도로 바치려 하오니/ 바다 같은 그 깊음 속에서/ 내 생이 더욱 풍요로워지기 위함입니다/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여/ 꺼진 내 등불을 당신께 바치려 하오니/ 당신으로부터 다시금 빛을 받아/ 그 찬란한 빛으로 내 마음이 더 밝고 더 아름다워지기 위함입니다~.”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그리스도장로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스캇 솔즈 목사는 저서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에서 “많은 영혼들은 대개 고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위대해질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윌리엄 쿠퍼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고민하던 중 희망의 찬송가를 썼고, 반 고흐도 같은 상황에서 세기의 역작들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윈스턴 처칠, 마틴 루터 킹도 우울함과 싸웠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은 귀가 먼 상태에서 불후의 명곡을 남겼다. 성경 속 인물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입어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역사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난 때문에,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신과 의사이자 임종 연구 분야 개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 성장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패배를 알고 고통을 알며, 몸부림을 알고 상실을 알고 나락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사할 줄 알고 민감하며 삶에 대한 이해 또한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긍휼과 온화함과 깊은 사랑의 관심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성경 속 질병과 치유
욥은 성경 속 고난의 대명사다. 열 명의 자녀와 집과 소유물을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온몸에 부스럼과 종기가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벅벅 긁는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퍼붓는다.(욥 2:9) 욥 자신도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며 태어난 것을 저주한다. 그래도 욥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바울은 많은 은사를 지녔다. 교양이 있었고 고등교육을 받았고 열심이 충만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도 육체에 가시가 있어 괴로웠다. 그래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주께 그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고 했다.
예언자 엘리야는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서 과부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됐다. 여인은 집안에 이런 불운이 닥친 것은 엘리야 때문이라고 했다. 엘리야는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방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쳐준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준 예언자 엘리사의 얘기도 있다. 나아만은 자기의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나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여종이 그에게 엘리사를 만나 보라 했다. 그는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만나 그가 하라는 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고 나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히스기야 왕은 심한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 병을 고치고 생명을 연장받아 15년을 더 살았다.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 갈릴리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병자들을 고치셨다. 4복음서에는 여러 병 고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고쳐주셨다. 친구 넷이 지붕을 뚫고 중풍에 걸린 친구를 들것에 태워 내렸을 때도 고쳐주셨다. 예수는 병을 고치는데 누구든 차별하지 않으셨다. 믿음이 있으면 모두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그분이 최고의 명의이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고통은 크고 영원하고 중한 영광을 이루는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