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효자, 효녀, 소년소녀가장 등으로 불려 온 ‘영케어러(Young Carer)’는 장애나 질병 같은 어려움이 있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아동·청소년·청년을 일컫는다. 최근 정부 조사에 의하면 국내 청년의 4.1%가 가족 돌봄을 맡고 있으며, 이들은 주당 평균 21.6시간을 돌봄에 쏟고 있다. 저출산으로 가족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돌봄에 떠밀린 영케어러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영케어러는 오랫동안 자신의 미래와 가족 돌봄을 맞바꾸며 살아왔다. 학업과 취업 준비에 매진해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시기에 가족 돌봄과 생계까지 감당해야 하니 자연스레 시간 빈곤에 빠져 삶의 기회 전반을 잃게 되기 쉽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은 챙기지 못해 학업과 취업 시기를 놓치고, 신체·정신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영케어러가 ‘미충족 의료’를 경험할 가능성은 일반 청년에 비해 최대 5배나 높았다.
돌봄은 생애 전반을 관통하며 이어지는 문제다. 많은 청년 영케어러는 어린 시절부터 돌봄을 맡아 왔다. 어린 영케어러는 보호자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기에 오히려 아픈 가족을 돌보고 집안일과 간병을 함께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누적된 피로와 돌봄 부담은 학업과 진로, 신체와 정신건강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억눌러온 피로와 과부하가 청년기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국가는 영케어러가 가족 돌봄으로 인해 미래 설계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시간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돌봄 책임을 가족 개인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체가 돼야 한다. 방문진료, 병원 동행, 통합돌봄 등 일상돌봄서비스를 촘촘히 설계하면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 모두가 안정적으로 국가의 돌봄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케어러가 호소하는 생계비와 의료비 부담도 주요 어려움 중 하나인 만큼 이에 대한 지원방안 역시 필수적이다.
또한 영케어러의 선의에만 기대는 무급 돌봄노동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그 경력을 반영해 진학이나 취업 시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장기간 돌봄으로 인한 고립과 탈진을 완화하기 위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지지하는 영케어러 자조모임 역시 활성화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기 발견이다. 아동기부터 드러나지 않은 돌봄 책임이 청년기에 위기로 폭발하지 않도록 학교 차원에서 정기 설문조사와 안내 교육을 실시하고 지각이나 결석이 잦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세심한 상담과 맞춤형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교사나 의료진이 돌봄 위기 신호를 감지했을 때 즉각 상담과 서비스 연계가 가능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조기 발견과 개입이 선행될 때 아동 영케어러가 청년기까지 돌봄에 갇히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조기 발견의 거점으로서 학교와 병원이 협력하고, 각 지역에 설치될 청년미래센터는 초기 상담과 지원 연계를 담당하는 허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돌봄 부담을 주변에 쉽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홍보 역시 적극 강화해야 한다.
현재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은 ‘위기아동·청년’을 34세 이하로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있어 연령대별 돌봄 특수성과 욕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 3월 법 시행에 앞서 돌봄 현황과 실태에 기반해 생애주기별 차별화된 제도 설계와 지원서비스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가족 돌봄을 떠맡는 순간, 그 돌봄의 무게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미래를 가불해 가족을 돌보는 영케어러의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속 가능한 돌봄 체계를 마련하는 일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책임을 증명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가 이들의 삶에 응답할 시간이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