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은 미래다

입력 2025-07-15 03:07

의학은 생명 그 자체를 다룬다. 하지만 지금껏 의학은 병을 중심으로 작동했다. 질병이 발생하면 치료를 시작하고, 손상이 드러난 후에야 회복을 논의했다. 예방 개념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주로 질병을 피하는 방어적 전략에 머물렀다. 이제 예방은 단순한 방어가 아닌 생명 유지를 위한 적극적 선택이 됐다.

전통적 예방의학은 감염병 시대의 위협에 맞서는 강력한 방패였다. 백신 접종과 위생, 건강검진은 인간의 기대수명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질환은 장시간 누적된 세포 수준 변화로 발병하는 만성질환이다. 이전 방식으로는 이런 병을 조기 감지하거나 사전 차단하기 어렵다.

예방의 중심은 점점 정보로 이동하고 있다. 유전자 배열과 단백질 활성도, 세포 간 미세한 상호작용 같은 생물학적 정보는 병의 발병 이전 단계에서 그 징후를 드러낸다. 최근 의학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개입 시점을 앞당기고 있다. 정밀의학과 유전자 기반 진단, 줄기세포 기술은 새로운 예방의학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2013년 스스로 양쪽 유방 절제술을 택했다. 졸리는 유전자 검사를 받은 뒤 BRCA1 유전자에 유해한 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와 이모, 할머니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가족력이 있었다. 의료진은 그에게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최대 87%, 난소암은 50% 이상이라고 경고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 수술을 결심한 그는 이후 뉴욕타임스에 ‘나의 의료 선택’이란 글을 기고하며 유전자 검사가 어떻게 삶을 구했는지를 알렸다. 이는 유전성 암 예방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크게 바꿨다. 실제 다수의 여성이 자기 유전 정보를 확인하고 예방적 조처를 하는 계기가 됐다.

생전 기술 혁신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는 이와 반대로 예측 가능한 질병에 조기 개입을 하지 못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잡스는 2003년 비교적 진행이 느린 신경내분비성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초기엔 수술 대신 식이요법과 대체치료를 선택했다. 여러 전문가는 그가 이때 수술을 받았다면 예후가 훨씬 달라졌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잡스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을 땐 이미 병이 전이된 상태였다. 환자가 질병을 어떻게 인식하고, 언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이라면 유전자 수준의 분석과 예후 예측 모델을 바탕으로 빠른 개입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 두 사례는 예방의학이 생명의 구조를 다시 짜는 능동적 전략이 됐음을 보여준다. 특히 유전자 분석과 조직 수준의 조기 진단, 줄기세포를 이용한 초기 개입은 특정 질환에서 병의 진행을 사전 차단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방 가능 질환으로는 유전성 유방암과 난소암, 대장암과 가족성 고지혈증, 제2형 당뇨병과 관절염, 심근경색과 알츠하이머병 등이 있다. 이들 질병은 공통적으로 조기 생물학적 변화가 명확하게 밝혀졌고 그 변화를 탐지해 예방적 개입이 가능한 기술이 이미 도입됐거나 도입을 앞두고 있다. 유방암의 경우 BRCA 유전자 변이, 대장암은 APC 유전자와 대장 용종의 조기 탐지, 당뇨병은 인슐린 저항성과 췌장 베타세포 기능의 조기 평가로 사전 대응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흐름은 의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예방은 이제 방어가 아닌 건강 관리 전략이다. 의료 기술은 병의 발생 이전, 생명 시스템이 균형을 잃기 시작하는 그 시점을 향하고 있다. 이는 질병의 수를 줄이는 차원이 아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의학은 점점 더 아직 환자가 아닌 이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과학적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예방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라보며 주어진 생명을 더욱 온전히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청지기적 책임을 일깨워준다.

선한목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