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아부의 기술

입력 2025-07-14 00:38

전 세계 지도자 트럼프에게
찬사 보내는 중… 까다로운
요구 받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

199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코에이 삼국지 게임 시리즈를 플레이하다 보면 영원한 동맹은 없고, 친분보다 실리가 우선되는 냉혹한 국제 관계의 현실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조조와 같은 최강자는 우호도가 높아도 동맹 관계가 끝나면 금세 등을 돌린다.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거나 승산이 없다면 좀처럼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 세력을 키우지 못한 군소 세력으로 플레이할 경우 매 순간 실리를 따진 최선의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선 이후 국제 정세는 게임보다 더 게임처럼 흘러가고 있다. 한국은 조조가 최강자가 된 상황을 군소 세력으로 헤쳐나가는 수준의 난이도를 요구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럼프는 동맹을 중시하는 전통적 외교 문법을 따르지 않고 거래 중심적이며 예측이 불가능하다. 각국 정상은 생존을 위해 각종 아부의 기술까지 동원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행보는 적극적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과의 ‘12일 전쟁’에서 트럼프의 ‘B-2 폭격기 동원’ 결정을 끌어냈다. 네타냐후는 이후 노벨위원회에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서한을 보냈다.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선 종이 편지를 받는 것을 즐기는 트럼프의 취향을 저격해 서한 사본을 건넸다.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5개국 정상은 최근 회담에서 취재진이 ‘트럼프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지지한다”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등의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트럼프는 “이건 하루 종일 해도 되겠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에 대한 각국 정상의 아부 목록에 “트럼프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공개 선언이 추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트럼프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달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가 이스라엘과 이란 간 분쟁을 아이들 다툼에 비유하자 “아빠(Daddy)가 가끔은 강한 언어를 써야 한다”며 맞장구쳤다. 트럼프는 기자들 앞에서 뤼터 총장을 언급하며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뤼터는 트럼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신은 수십 년간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낼 것”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과도한 아부라는 지적도 나왔지만 뤼터 총장 덕분에 나토 회의가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는 시각도 있다.

아부가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2월 정상회담에서 취재진이 트럼프의 첫인상을 묻자 “TV에서 보던 유명인을 직접 만나 정말 기뻤다. 매우 진솔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트럼프는 지난 4월 관세 협상 테이블에서 일본 측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에게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문구가 새겨진 붉은색 모자를 선물했다. 아카자와는 마가 모자를 쓰고 엄지를 치켜든 채 사진을 찍었다. 일본 내부에선 굴욕적 저자세라며 ‘마가자와가 됐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일본은 각종 아부의 기술을 선보였지만 막상 관세 문제에서 별다른 실익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고관세를 통보받았다. 돌변한 이시바 총리는 “깔보는데 참을 수 있느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트럼프와의 협상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한 아부는 필요하지만 결국 트럼프의 국익 중심 사고까지 바꿀 수는 없다. 트럼프의 이란 핵시설 폭격 결정도 ‘이스라엘이 이미 전쟁을 장악해 미국이 손해 볼 게 없다’는 계산의 결과물이란 분석이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고율 관세,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중국 견제 참여 등 까다로운 요구를 받고 있다. 외부에 과시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 트럼프의 성향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한국이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실리를 얻기 위한 정교한 ‘아부의 기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나성원 국제부 차장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