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자는 한국의 요구를 일본이 끝까지 수용하지 않아 결국 표결이 이뤄졌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이후 조선인 강제 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정식 의제화를 통해 부각하려 했다.
하지만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에서 빼고 가자’는 일본의 수정안이 표결로 채택되며 한국이 요구한 안건은 즉시 폐기됐다. 표결 결과는 일본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네스코의 특성상 문제를 한·일 양국 간 대화와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일본 측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24표 중 일본 주장에 대한 찬성표는 7표에 지나지 않고, 찬성의 내용도 방법론이지 일본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처음 약속과 달리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도쿄에 정보센터를 만들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징용자 학대가 없었다”는 주민 발언을 공개하는 등 강제징용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을 버젓이 전시했다. 이후 ‘거친 노동 환경’ ‘한국·일본 임금·복지 비교 연구’ 등을 추가 언급했지만 피해자 증언·추모 공간 계획은 이행하지 않았다. 용어도 ‘강제’ 대신 ‘동원’이란 표현을 썼다. 이에 세계유산위가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지적하면 일본이 추가 조처를 하는 양상이 지난 10년간 반복됐다. 위원회의 관련 결정문 채택만 4차례에 달했고, 2021년에는 이례적으로 일본 측에 강한 유감이 표명되기도 했다.
세계유산위는 유네스코와 세계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조사단을 꾸려 실태 파악에 나섰다. 그 결과 2021년 7월에는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당시인 2015년 6월 일본이 약속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후속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날렸다.
일본이 세계유산을 등재한 뒤 약속을 깨는 사례가 갈수록 쌓이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7월 또 다른 강제징용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의 동의를 얻었지만, 이후 마련한 전시 시설에서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을 빼거나 추도사 없는 ‘맹탕’ 추도식을 여는 등 약속 파기를 반복하고 있다. 사도광산에 관한 한국 정부의 애초 입장은 당연히 비판적이었다. 2021년 12월 우리 외교부는 군함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일본이 또 다른 강제징용 현장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변인 성명을 냈다.
그랬던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고 있다는 보도가 지난해 5월 일본에서 나왔다. 산케이신문은 ‘2022년 5월 한·일 관계 개선에 전향적인 윤석열정권이 출범하면서 한국 측 태도에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사도광산에 대한 윤석열정부의 태도 변화는 이번 세계유산위에서의 일본 수정안 채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한 이재명 대통령은 한·일이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이와 별개로 원칙 있는 대응을 하겠다는 ‘투 트랙’ 대일 기조를 밝혔다. 이에 따라 한·일 정상은 이재명정부 출범 직후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에 서로 박자를 맞추며 좋은 흐름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번 일본의 행보는 ‘원칙 있는 과거사 대응’의 중요성을 커지게 하는 모습이다. 그러잖아도 이 대통령에 대한 일본의 대체적인 인식은 “이 대통령은 본래 반일에 가까워서 지금의 좋은 관계는 지지율이 떨어지면 바로 반일로 돌아설 것이다”라는 것이다. 혹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지율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원칙 있는 대응의 모습일 것이다.
이명찬 전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