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크루즈 여행 붐… 한국은 여전히 잠시 들르는 곳

입력 2025-07-14 02:06
지중해 몰타의 그랜드 하버 선착장에 스위스 MSC 크루즈의 크루즈선 ‘스플렌디다’가 정박해 있는 모습. 하나투어 제공

평생 저축한 돈으로 실버타운 대신 바다 위를 선택한 77세 미국 여성 샤론 레인씨의 사연이 화제다. 미국 CNN방송 등 외신에 따르면 레인씨는 주거형 크루즈선 ‘빌라 비 오디세이’호의 내부 선실을 구입하고, 월 3000달러(약 412만원)의 이용료를 지불하며 15년간의 세계 여행에 나섰다.

이 크루즈 운영업체에 따르면 크루즈 객실을 분양받기 위해선 내부 선실 기준 최소 12만9000달러(약 1억7700만원)를 내야 한다. 여기에 탑승객들은 최저 2000달러(약 275만원)의 월 이용료를 지불한다. 레인씨는 일본, 뉴질랜드 등 147개국 400여개 항구를 도는 여정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야 진짜 삶을 시작했다”며 “장도 안 보고, 빨래도 안 해도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는 것보다 비용도 저렴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크루즈 여행이 새로운 글로벌 여행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13일 국제크루즈선사협회(CLI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크루즈 여행객 수는 3460만명에 달했다. 2023년 3170만명 대비 9% 늘어난 것으로, 사상 최대 기록이다. CLIA가 발표한 크루즈 여행 최신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여행객들은 평균 7.1일 동안 크루즈 여행을 즐겼다. 여행객의 평균 연령은 46.5세로 중장년층 중심이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과 가족 단위 이용객도 늘어나는 추세다.


국가별로 보면 지난해 기준 레인씨처럼 미국인이 1912만명으로 가장 많이 크루즈를 탔다. 독일 257만명, 영국 240만명, 호주 132만명 등 유럽계 관광객도 많았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인 93만여명, 일본 22만7000명, 대만 19만8000명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은 이 통계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코로나19 전인 2019년 한국에서 출발한 크루즈선 탑승객은 4만9000명이었다.

글로벌 크루즈 산업은 미국의 카니발 크루즈 라인, 로얄 캐리비안, 노르웨이지안 크루즈 라인에 더해 스위스에 본사를 둔 MSC 크루즈 등 4개 선사가 과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를 도는 세계일주 상품뿐 아니라 태평양과 대서양 일대를 항해하는 중단기 상품, ‘해상 실버타운’처럼 살 수 있는 거주형 크루즈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크루즈 여행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회복세를 보인다. 해수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크루즈 관광객은 81만명으로 집계됐다. 입항 선박은 414척이었다. 2023년(27만3000명·203척)과 비교하면 관광객 수는 3배, 선박 수는 2배가량 늘었다. 올해에는 560척, 109만명이 크루즈를 타고 방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크루즈 산업에서 한국은 한참 뒤처져 있다. 한국은 크루즈 여행의 출발지라기보다는 ‘기항지’(항해 중인 배가 잠시 들르는 항구) 역할에 머물고 있다. 관광객의 80% 이상이 제주항에 집중돼 있다. 부산과 여수 등도 단기 기항 위주에 그친다. 쉽게 말해 외국 선박이 잠시 들렀다 떠나는 구조다. 항구 주변 지역 관광과 소비 유발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노르웨이지안 크루즈 라인의 크루즈선 ‘앙코르’가 미국 알래스카를 항해하고 있다. 하나투어 제공

한국 크루즈 산업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성장세가 더뎠다. 2016년 195만명에 달했던 크루즈 입국객은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인한 한한령으로 2018년 20만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팬데믹 시기에는 운항이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2023년부터 겨우 회복세에 접어들었으나 체류형 관광으로 연결되기엔 산업 구조 자체가 취약하다.

관련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산업 확대를 위해 풀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부산항을 제외하면 제주, 인천, 여수, 속초, 포항 등 주요 항만에 대형 크루즈를 수용할 전용 터미널이 없다. 세관·출입국·검역(CIQ) 시설이나 환승 인프라도 미흡하다. 항만에서 도심으로의 교통편도 마땅치 않아 관광객이 즐길 거리가 별로 없다.

제도적인 장애물도 있다. 외국 선박이 국내 항구를 2곳 이상 기항하려면 여객운송법상 허가가 필요하고, 관광 목적으로 입항하더라도 출입국과 검역 절차가 복잡하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일단 크루즈선을 타고 들어온 관광객을 잡아야 하는데, 매력적인 상품이 없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여행 수요 기반도 취약하다. 국내에서 크루즈 여행은 ‘비싸고, 노년층이 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국내에서 출항하는 노선은 거의 없고, 그나마도 일본, 대만 등을 들렀다 오는 수준이다. 국적 선사가 없어 맞춤형 장기 상품 개발도 힘들다.

해수부와 문체부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지난해 6월 ‘크루즈 관광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특히 제주 강정항을 ‘크루즈 준모항’으로 지정해 지난 5월부터 시범 운영하고 있다. 준모항은 일부 승객이 승·하선하고, 관광과 보급 기능도 수행하는 항구로, 기존 단순 기항보다 체류 시간과 국내 관광 소비 효과가 크다. 앞으로 부산, 새만금, 포항 등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민간에서는 수요 유치를 위해 출발 노선을 확대하고 있다. 부산에 기반을 둔 팬스타크루즈는 부산발 단기 항로를 중심으로 청춘 크루즈, K컬처 테마 상품을 운영하며 체험형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관광개발은 일본·동남아 노선 외에도 중국·대만 전세선을 유치하고, 크루즈와 육상 관광을 엮은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다. 한국인 여행객을 타깃으로 한 국내 출발 노선과 준모항 기반 상품을 개발 중이다.

하나투어, 모두투어 등 여행사들도 일본, 대만 등 근거리 여행을 넘어 ‘플라이 앤드 크루즈’ 상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밀라노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간 뒤 현지에서 크루즈선을 타고 지중해와 중남미·카리브해를 여행하는 식이다. 여행 일정은 3주가량이며 노년층뿐 아니라 20~30대 등 다양한 고객군을 대상으로 한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크루즈 고객 연령대는 중장년층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아직 메인 타깃의 변화는 크지 않지만 최근 신혼부부, 가족 동반 등 젊은 연령층 유입도 높아지고 있다”며 “국내에서 출발하는 초대형 크루즈가 도입되기 위해선 대형 항구를 갖추는 것뿐 아니라 장거리 크루즈 여행을 떠나려는 고객 수요층이 풍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